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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면 미원리 홍석무사적비(米院面 米院里 洪錫武事蹟碑) 본문
미원면 미원리 약물내기공원에 자리한 홍석무의 사적비입니다.
홍석무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호는 만계(晩溪), 본관은 남양이다. 회덕 신탄진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조부 홍순각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부친 홍이정은 참봉을 지냈다. 홍석무는 어려서부터 담력이 출중하였고, 특히 효성이 지극했다. 17세 때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묘 곁에 묘막을 짓고 형과 함께 시묘했는데, 벽도 바르지 않고 상복도 벗지 않고, 죽으로 3년을 연명하여 슬픔을 다하였다. 또한 복을 벗은 후에는 3세 때의 부친상에 거상을 하지 못한 것이 죄가 되어 선친을 위해 3년 상을 추상하고자 하였으나 조부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신 평생을 죄인으로 자처하여 일생 동안 사치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는 항상 짚으로 자리를 깔았고, 관직에 있을 때에도 두텁게 자리를 깔지 않았다.
26세에 사용에 천거된 이후 30세에 청하현감이 되었고, 34세에 토산 현감으로 전보되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도원수 김자점이 국사는 아랑곳없이 대군을 몰고 토산으로 사냥을 하러 나오자 홍석무는 김자점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말했으나 김자점은 이를 묵살하였다. 그날 밤 호군이 갑자기 물밀 듯이 밀려와서 많은 사람이 죽고 재물을 약탈당하였는데, 이때 토산 우봉 강음 서홍 등의 수령들이 합심하여 성은 겨우 지킬 수가 있었다.
39세에 홍석무는 고령 현감이 되었는데, 이때 영남지방에는 금동의 5형제가 토적이 되어 치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에 홍석무는 경내의 군인들을 지휘하여 이들 중 3형제를 잡아 죽이고 잔당들은 말로 타일러서 훈방하였다. 이후 사포서 별제·사복주부·군자감 주부 등을 제수 받았고, 50세가 되던 해인 1650년(효종원년)에는 선치(善治)하였다 하여 어병을 하사받았다. 또 이듬해 강음 현감이 되었을 때 어사가 선치하였다고 장계를 올려 표리일습을 하사받았고, 수령을 지낸 4개 고을에서 모두 선정비가 섰다. 이후 진잠, 덕천현령을 거쳐 공주목사와 풍덕부사를 지내고, 67세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숙종 43년에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 되었고, 순조 6년에 충효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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