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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면 미원리 남양홍문충효각(米院面 米院里 南陽洪門 忠孝閣)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미원면 미원리 남양홍문충효각(米院面 米院里 南陽洪門 忠孝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4. 10. 23. 07:57



미원면 미원리에 있는 이 충효각은 1801년(순조 1)에 충효로 지평(持平)에 증직된 만은(晩隱) 홍주화(洪冑華)의 충효각에 1806년(순조 6)에 충효로 참판(參判)에 증 직된 그의 할아버지 만계(晩溪) 홍석무(洪錫武)와 1819년(순조 17)에 효부로 명정 된 그의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 등 3인의 충효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이다. 지 금의 충효각은 1967년에 중수하고 1986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는 3인의 충효문 편액을 걸었다. 정려 안에는 1967년에 판각한 중수기(重修記)가 걸려 있으며, 앞에 1986년에 세운 사적비와 중수비가 있다. 

 

홍석무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호는 만계(晩溪), 본관은 남양이다. 회덕 신탄진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조부 홍순각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부친 홍이정은 참봉을 지냈다. 홍석무는 어려서부터 담력이 출중하였고, 특히 효성이 지극했다. 17세 때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묘 곁에 묘막을 짓고 형과 함께 시묘했는데, 벽도 바르지 않고 상복도 벗지 않고, 죽으로 3년을 연명하여 슬픔을 다하였다. 또한 복을 벗은 후에는 3세 때의 부친상에 거상을 하지 못한 것이 죄가 되어 선친을 위해 3년 상을 추상하고자 하였으나 조부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신 평생을 죄인으로 자처하여 일생 동안 사치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는 항상 짚으로 자리를 깔았고, 관직에 있을 때에도 두텁게 자리를 깔지 않았다.

 

26세에 사용에 천거된 이후 30세에 청하현감이 되었고, 34세에 토산 현감으로 전보되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도원수 김자점이 국사는 아랑곳없이 대군을 몰고 토산으로 사냥을 하러 나오자 홍석무는 김자점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말했으나 김자점은 이를 묵살하였다. 그날 밤 호군이 갑자기 물밀 듯이 밀려와서 많은 사람이 죽고 재물을 약탈당하였는데, 이때 토산 우봉 강음 서홍 등의 수령들이 합심하여 성은 겨우 지킬 수가 있었다.

 

39세에 홍석무는 고령 현감이 되었는데, 이때 영남지방에는 금동의 5형제가 토적이 되어 치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에 홍석무는 경내의 군인들을 지휘하여 이들 중 3형제를 잡아 죽이고 잔당들은 말로 타일러서 훈방하였다. 이후 사포서 별제·사복주부·군자감 주부 등을 제수 받았고, 50세가 되던 해인 1650년(효종원년)에는 선치(善治)하였다 하여 어병을 하사받았다. 또 이듬해 강음 현감이 되었을 때 어사가 선치하였다고 장계를 올려 표리일습을 하사받았고, 수령을 지낸 4개 고을에서 모두 선정비가 섰다. 이후 진잠, 덕천현령을 거쳐 공주목사와 풍덕부사를 지내고, 67세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숙종 43년에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 되었고, 순조 6년에 충효 정려가 내려졌다. 



홍주화는 1660년(현종 1년) ~ 1718년(숙종 44년) 조선의 학자. 자는 군실(君實), 호는 만은(晚隱). 본관은 남양(南陽). 송시열의 문인(文人). 숙종 초 송시열이 유배(流配)가게 되자 스승의 명으로 그의 서적을 보관했고,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그 부당함을 상소했으며 송시열이 사사(賜死)되자 박세휘(朴世輝)ㆍ한성우(韓聖佑) 등과 백인소(百人疏)를 올려 스승의 신원(伸寃)을 상소했다. 그 후 벼슬할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심하다가 권상하(權尙夏)가 송시열의 유명(遺命)으로 만동묘(萬東廟)를 세울 때 이를 보좌하여 그 건립에 힘썼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주화 [洪冑華] (인명사전, 2002. 1. 10., 인명사전편찬위원회)

 

1801년(순조 1년)에 충효로 지평(持平)에 증직된 만은(晩隱) 홍주화(洪冑華, 1660~1718)의 충효각에 1806년(순조 6년)에 충효로 참판(參判)에 증직된 그의 할아버지 만계(晩溪) 홍석무(洪錫武, 1601~1667)와 1819년(순조 19년)에 효부로 명정된 그의 처 전주이씨(全州李氏) 등 3인의 충효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남양홍씨 문중의 정려이다. 지금의 충효각은 1967년에 중수하고 1986년에 보수한 건물로 밖은 ‘충효정려(忠孝旌閭)’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는 이 충효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이다. 큰 돌로 바닥을 정리하고 철제로 사면을 둘러 내부에 널찍한 마당을 만들어 여러 개의 비석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정려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1986년에 세운 사적비(事蹟碑)와 중수비(重修碑)가 있고, 오른쪽에는 1967년에 판각한 ‘남양홍씨충효중수기(南陽洪氏忠孝重修記)’가 있는데 비교적 관리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정려는 낮은 돌기둥 위에 나무 기둥을 올렸으며 사면은 홍살로 막고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안에는 ‘증참판행목사홍석무충효지려(贈參判行牧使洪錫武忠孝之閭)’, ‘증통덕랑사헌부지평홍주화충효지려(贈通德郞司憲府持平洪冑華忠孝之閭)’, ‘효부증지평홍주화처전주이씨지려(孝婦贈持平洪冑華妻全州李氏之閭)’라고 쓴 3인의 충효문 편액과 1967년에 판각한 “중수기(重修記)”를 걸었다. 정각 앞에 1986년에 세운 사적비와 1986년에 세운 중수비가 있다. 2015년 4월 17일 청주시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