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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자리. 본문

푸른바다의 창가에서/photo 에세이

그때 그자리.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4. 10. 24. 19:58

 

 

 

 

너는 언제나 그 자리인데

오랫만에 찾아본다는 핑계로

이리저리 헤매다 다시 찾은 너의 모습

참 반갑고 반가웠다.

 

20241024옥천헌비의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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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군 이원면 소재지에서 경부 국도를 따라 영동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왼쪽으로 우암이 태어난 구룡촌의 입구가 나오고 여기서 500여 미터를 더 가면 원동리라는 마을에 이른다. 이곳에서 나지막하게 왼쪽으로 꼬부라진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고개 마루에 이른다. 이 고개 마루에서 왼쪽 낮은 산등성이를 올려다보면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묘와 함께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 묘가 바로 수옹 갑조에게 젖을 먹여준 유모헌비(憲菲)의 유택[묘]이며, 그 유택 앞에 서 있는 표석(表石)은 1688년(숙종 14)에 우암이 그의 나이 82세가 되던 해에 세운 비석이다.

우암의 아버지는 수옹이고, 수옹의 아버지는 도사(都事) 응기(應期)이다. 도사공은 광주이씨(廣州李氏) 병조판서 이윤경(李潤慶)의 따님과 혼인하였다. 이씨부인은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수옹은 그 중 막내로 이씨부인의 나이 41세가 되던 해인 1574년(선조 7)에 태어났다. 이처럼 이씨부인이 많은 나이에 출산을 한 탓으로 몸이 쇠약해서 부득이 몸종인 헌비(憲菲)에게 젖을 먹이도록 부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옹의 어머니는 수옹이 겨우 4살 때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니 수옹은 이 유모 헌비를 어머니처럼 따르며 그의 품에서 자랐다.

이 헌비는 본래 이씨부인의 친정댁 몸종이었는데, 이씨부인이 시집을 올 때 교전비(轎前婢)154)로 데리고 와서 길러 평생을 같이 살았다. 그 헌비는 자라서 강씨(姜氏) 성을 가진 사람과 혼인을 하였는데 그녀에게는 마침 수옹과 비슷한 또래의 수문(叟文)이라는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수옹이 이 헌비의 젖을 먹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이 수문과는 비록 신분상의 차이는 있으나 친형제처럼 다정하게 자랐다고 한다.

수옹과 유모와의 사이에 이러한 정이 있었기 때문에 수옹이 뒤에 구룡촌 곽씨댁으로 장가를 들고 처가살이를 할 때도 헌비는 이곳까지 따라와 함께 살게 되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결국 수옹이 살던 집이 바라다 보이는 이 언덕에 묻히게 된 것이다.

그 유모비에는 증영의정 송공 수옹(贈領議政 宋公 睡翁)유모헌비지묘(乳母憲菲之墓)자강수문묘 재좌(子姜叟文墓 在左)숭정 육십일년 계 이월 일 입(崇禎 六十一年 季 二月 日立)이라는 내용이 세로 넉 줄로 새겨져 있다. 우암의 아버지에 대한 효성은 남달리 지극했다. 노년에 접어들면서 드디어 아버지가어릴 때 아버지에게 고맙게 젖을 먹여 키워준 유모에게까지 추모의 정을 쏟아 이처럼 자신이 직접 친필로 써서 비를 세운 것이다. 이 유모비는 당시의 엄격한 계급사회에서 노비가 정당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던 양반사회에서 우암 가문이 베풀던 인도주의적인 처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의미를 가진다. <가문전래 설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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