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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면 명암 곡산연씨세거지비(道安面 鳴岩 谷山延氏世居地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도안면 명암 곡산연씨세거지비(道安面 鳴岩 谷山延氏世居地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5. 1. 5. 15:03

 

화성리 북촌을 흔히‘명암(鳴岩)’또는‘우루배’라고 한다. 이곳에 울어바위(鳴岩)가 있어 유래한 지명이다.어느 날, 한 노승이 이곳 마을앞을 지나다가 큰 바위를 보며, “참으로 영험하구나! 나라에 큰일이 생길 때마다 황소 울음소리가 날 것이다.”라고 했다.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노승의 말을 빌어 바위를 명암(鳴岩 ; 울어바위)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나, 한일합방이 되었을 때, 바위에서“웅∼ 웅∼”하는 소리가 울렸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흙에 파묻혀 그 형상을 확인 할 길이 없다. 

 

명암마을 입구 초입에 있는 곡산연씨세거지비( 谷山延氏世居地碑)이다. 마을회관옆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연석으로 만들어 세웠으며 몸돌에는 부모를 향한 효를 다하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곡산연씨를 이 곳 지방에서는 도안에 많이 거주한다고 하여 도안연씨라고도 불렀습니다.

 

명암 마을은 소위‘울어바위’또는‘우르배’등으로 불리고 있다. 명암 마을은 화성리에 속한 마을 중에서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은 남촌·북촌·행화정 등 3개 마을과 이웃하고 있다. 남촌에서 증평으로 가는 길에 길 모롱이(모퉁이)가 있는데 이것이 진모랭이다. 명암사람들은 이 고개와 모롱이를 통해서 증평장을 보러 갔다고 한다. 명암이라는 마을 지명은 정조 13년(1789)에 간행된『호구총수(戶口總數)』에도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명암리 는 당시에 명암상리(鳴岩上) 와 명암하리(鳴岩下里)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1912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고시한『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에 명암리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에 두 마을이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1914년에 다시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명암리는 화성리에 속하게 됐다. 이러한 행정구역은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다. 명암마을은 이성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줄기가 마을 뒤의 상산봉(上山峯)을 이루고, 이 산꼭대기에서 오른쪽으로 칠곡산(七谷山)과 주실산(珠實山)이 뻗어있으며, 왼쪽으로는 안산(安山)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마을 남쪽 안산(安山)의 아래에 넓고 웅장한 바위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승려가 탄복하면서 이 바위가 유명한 바위라고 하며 그그 위에‘명암(鳴巖)’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국가의 대란이 일어나면 바위가 황소처럼 울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뒤부터 마을의 이름을 명암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이 전해오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이 때에 바위가 울었다고 한다.주민들에 의하면‘명암’이라고 새겨진 바위는 세 곳에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경술국치(庚戌國恥) 이전에 마을 입구 빨래터에, 두 번째는 북촌에, 세 번째는 남촌 꼭대기에 있었다고 한다. 남촌의 바위는 경술국치(庚戌國恥)때 울었다고 전한다. 이 바위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90여년 전 일본제국주의시대에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청주~충주간 도로와 철도가 부설되면서 땅속에 묻히게 됐다고 한다.[증평군지]

 

 

마을초입에는 곡산연씨에서 배출된 인물들의 비석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