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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읍 사락리 이상급신도비(周德邑 社樂里 李尙伋神道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주덕읍 사락리 이상급신도비(周德邑 社樂里 李尙伋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5. 3. 14. 23:43

삼거리에서 산모롱이를 지나가면 안음골 앞 정문거리가 나온다. 정문거리 앞에는 경녕군묘를 알리는 표석이 외로이 서있다. 안음골로 들어가는 길은 정문거리에서 들어가는 길과 방구모랭이에서 들어가는 두 길이 있다. 안음골에는 열녀문화류씨정려각. 이상급신도비, 경녕군신도비, 이상급을 비롯한 벽진이씨 묘, 경녕군묘 등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경녕군묘의 청룡자락에는 황금곡(사락리)을 개척한 함종어씨의 선대 묘소가 있다. 안음골에서 매남 마을 쪽으로 향하다보면 음동소류지 주변에 넓은 들과 골짜기가 펼쳐져 있다.

 

경녕군 묘를 지나 안음골 안쪽으로 들어가면 이상급신도비와 벽진이씨 묘역을 볼수 있습니다.

 

안음골 앞 삼거리(정문거리)에서 왼쪽 길로 올라오면 산기슭에 비각이 보인다. 이 비는 8각의 대석(臺石) 위에 8각기둥형의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은 형식이다. 석재는 흰색 대리석이다. 대석에는 8면에 걸쳐 조각을 하였는데, 6면에는 연꽃을, 대칭되는 2면에는 동물상을 조각하였다. 대석의 윗면은 큼직큼직한 연꽃잎 8개를 조각하고 그 위에 비신을 세웠다.
비신과 이수는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다. 비신은 한면의 너비가 26cm로 8면에 동일한 글자로 장식하였다. 비문은 예서체로 새겼다. 이수는 4각으로 전후면에 각각 두 마리의 용을 사실적으로 조각하여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비문의 끝의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송시열 찬(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宋時烈 撰), 현손남 진사 정상 전(玄孫男 進士 挺相 篆), 진사 정복 서(進士挺襆 書)’를 보면 우암(송시열)이 비문을 썼음을 알 수 있어서 붕당의 소속을 알게 해 준다.이상급(李尙伋,1572년~1637년)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사언(思彦), 호(號)는 졸부(拙夫).습재(習齋), 시호(諡號)는 충강(忠剛)이다. 희선(喜善)의 아들로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문인(門人)이며 1603년(선조 36)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606년(선조 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정자(正字).저작박사(著作博士)등을 지내고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연경(燕京)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오던 중에 평안도사(平安都事)가 되었다.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있을 때 정조(鄭造)가 안찰사(按察使)로 부임하자, 그 속관(屬官)이 되기 싫어 사임하고 충주(忠州)에 들어가 경조(耕釣)와 후진들의 교육에 힘썼으며,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장령(掌令).집의(執義).단천(端川)과 연안군수(延安郡守)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때 남한산성으로 인조(仁祖)를 호종(扈從)했다가 묘사(廟社)를 모시고 강화도로 간 중씨(仲氏) 상길(尙吉)이 순절했다는 비보를 듣고 통곡하며 강화(江華)로 가던 도중에 적병(敵兵)에게 살해되었다. 1777
년 병자제사(丙子諸史) 존주록(尊周錄)에 명재(命載)되었고, 유소(儒疏)로 인하여 대신헌의(大臣獻議)에서 일문쌍절(一門雙節)이라고 하였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순조 때에 충강공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충주 이상급 신도비

 

충주 이상급 신도비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이상급의 신도비. [개설] 이상급(李尙伋)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자는 사언(思彦), 호는 습재(習齋)·당부(戇夫)이며, 시호는 충강(忠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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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의 모양이 8각형으로 희소성이 있습니다.

비두는 두마리의 용이 엉켜있는 모습을 문양하였습니다. 대좌는 동물의 모양과 함께 무늬등으로 장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