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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읍 사락리 이련묘갈(周德邑 社樂里 李堜墓碣) 본문
이 묘역에서 동남쪽으로 100m정도 떨어진 산기슭에 특이한 비석이 하나 있다. 사각기단, 비신, 지붕돌은 일반적 양식인데 비문형식이 특이하다.우측면에 ‘벽진이공 련지묘(碧珍李公 堜之墓)’라고 묘비명이 있고 전면에서 좌측면으로 돌면서 비면 상단부에 ‘증좌승지이공묘비(贈左承旨李公墓碑)’라는 전(篆)이 있고 전면 우측에 ‘유명조선국 증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겸 경연춘추관 이공묘갈명(有明朝鮮國 贈 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兼 經筵春秋館 李公墓碣銘), 파평 윤증 찬(坡平尹拯 撰), 증손남주원 정복 서병전(曾孫男 主員 挺襆 書幷篆)’이라 쓰고 비문 본 내용이 적혀있다.
좌측면에는 ‘증가선대부 이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贈 嘉善大夫 吏曹參判兼 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副總管), 배 정부인 전의이씨(配 貞夫人 全義李氏)’라는 비명이 있고 후면에는 전면에 이은 비문 내용이 있다.
이련은 이상급의 아들입니다.
이상급의 묘지와 함께 아들인 이련의 무덤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무덤의 비석은 후손들에 의하여 후보되었습니다. 이련의 아들인 이지걸의 무덤은 맹동면 쌍정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 또한 윤증이 찬하였습니다.
맹동면 쌍정리 이지걸묘비(孟洞面 雙呈里 李志傑墓碑)
맹동면 쌍정2리 배미마을에 있는 조선시대의 문신인 이지걸의 묘비입니다.묘비를 바라보며 옆으로의 작은 야산에는 묘지도 자리하고 있습니다.비석의 상태는 양호합니다.묘비는 윤승이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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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贈) 좌승지(左承旨) 이공(李公) 묘갈명
공의 휘는 련(堜), 자는 교옹(郊翁), 성은 이씨(李氏)이다. 시조 총언(悤言)은 신라 말에 벽진 태수(碧珍太守)가 되어 견고한 성(城)을 굳게 지켰는데, 고려 태조가 공과 친교가 있어서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으로 깨우치고서 혼인을 약속하고 본읍(本邑)의 장군(將軍)으로 봉하였다. 벽진은 지금의 성주(星州)인데, 자손이 이에 본관으로 삼았다. 고려 시대가 끝날 때까지 벼슬아치가 대대로 나왔고, 장군으로부터 14세(世)인 휘 희목(希牧)에 이르러서 우리 조선에 들어와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가 되었다. 또 3세 뒤에 휘 약동(約東)은 성종조(成宗朝)의 명신(名臣)으로 네 조정에서 벼슬을 역임하였고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고조의 휘는 유번(有蕃)인데 참봉을 지냈고 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증조의 휘는 석명(碩明)인데 군수를 지냈고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희선(喜善)인데 교관(敎官)을 지냈고 찬성(贊成)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의 휘는 상급(尙伋)인데, 병조 참지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형 충숙공(忠肅公) 상길(尙吉)과 더불어 모두 곧은 절개로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선비(先妣)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첨지중추부사 휘 주(冑)의 따님인데, 중추공은 곧 음애(陰崖) 문경공(文敬公) 이자(李耔)의 외손이다. 만력 정미년(1607, 선조40) 1월 20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성품이 효성스럽고 신중하여 어렸을 때부터 한 가지 일이나 한 가지 행실도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았다. 아우 승지공 인()은 공보다 한 살 적은데 유년 시절부터 서로 화기애애하게 잘 지냈으나, 승지공이 조금이라도 잘못을 하면 공이 정색하고서 말을 하지 않아 승지공이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으며, 승지공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나서야 공의 마음이 풀렸다. 장성해서는 친척에게 후하게 대하고 남을 응대하는 데에 공손히 하였다. 또한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말수가 적은 데다가 성품이 고결하고 준엄하여 동년배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가정에서 배울 때 널리 여러 책을 보았는데 걸핏하면 침식(寢食)을 잊곤 하였다. 일찍이 절에 가서 독서할 때 친구가 찾아오자 공은 사례하고 말하기를, “친구가 멀리서 왔으니 어찌 정답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잠깐 동안이라도 공부를 중단하면 엄친의 훈계를 어기게 될까 두렵다.” 하고는 즉시 돌아와 책을 보았다. 친구들과 모여서 시문을 지을 때에 한 편의 글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기 전에는 수많은 말로 앞에서 떠들어 대도 본체만체하고, 글을 다 짓고 나서야 비로소 대화를 약간 나누었다.
상제(庠製)에 응시했다가 한 번 낙방한 뒤로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다시 응시하기를 다투어 권하였으나 끝내 생각을 바꾸지 않았으니, 그의 견고한 마음가짐과 구차하지 않은 일 처리가 이와 같았다. 기사년(1629, 인조7)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예제(禮制)보다 지나치게 슬퍼한 탓에 몸이 수척해지고 병이 들어 수년 동안 고질병이 되었고, 끝내 을해년(1635) 2월 24일에 작고하니, 나이 겨우 29세였다.
판서공이 조문객을 응대하다가 목이 메어 말하기를, “내가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있을 때 문방(文房)의 기물 하나를 만들어 보냈는데, 아들이 돌려보내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비록 하찮은 물건이지만 백성의 수고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런 것으로 아버지의 정사를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내 아들의 뜻과 행실이 이와 같은데도 하늘이 너무 빨리 아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으니, 내 어찌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아, 또한 부모를 위한 지극한 정성을 알 수 있다.
초실(初室)은 임천 조씨(林川趙氏)로 참판 희일(希逸)의 따님이다. 타고난 성품이 정직하고 총명하여 시어머니에게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 신축년(1601, 선조34)에 태어나서 23세에 작고하였다. 계실(繼室)은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도사(都事) 구준(耈俊)의 따님이자 청강공(淸江公) 제신(濟臣)의 손녀이다. 씩씩하고 엄숙하며 효도하고 공경하여 부덕(婦德)을 두루 잘 갖추었고, 평소의 사적(事迹)은 남들이 따라가기 어려운 점이 많아서 친척들이 모두 여중군자(女中君子)라고 일컬었다. 병오년(1606)에 태어나서 정미년(1667, 현종8)에 작고하였다.
아들 둘을 낳았으니, 장남은 지웅(志雄)인데 한성부 서윤이고, 차남은 지걸(志傑)인데 첨지중추부사이다.
내외(內外)의 손(孫)과 증손, 현손이 50여 인이나 되는데, 각각 서윤(庶尹)과 첨추(僉樞) 두 공의 갈문(碣文)에 상세히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을 충주(忠州) 서쪽 덕면(德面) 만산(蔓山)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바로 선영(先塋)이다. 조 부인(趙夫人)의 묘는 양주(楊州) 노원(蘆原)의 찬성공(贊成公) 묘소 옆에 있고, 이 부인(李夫人)의 묘는 공의 묘소 뒤에 있다. 공은 작고한 지 46년 뒤에 첨추공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됨에 따라 좌승지에 추증되고, 두 부인은 모두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아, 공은 이미 일찍 작고하여 후세에 전할 만한 현저한 업적이 없다. 나는 늦게 태어났고 또한 한 번도 공을 만나 뵌 적이 없어서, 드러나지 않은 공의 덕을 말로 칭송하기는 좀 어렵다. 그러나 글은 반드시 많을 필요도 없고, 반드시 갖출 필요도 없다. 효도하고 우애하는 정성, 공경하고 삼가는 행실, 간결하고 엄중하며 바르고 확고한 절조, 부지런하고 독실하며 민첩하고 박식한 학문만으로도 충분히 자손에게 불식(不食)의 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삼가 행장을 간추려 서술하고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명문가의 훌륭한 아들로 / 名家令子
옥처럼 깨끗하고 금처럼 귀한데 / 如玉如金
지조를 가다듬고 학업에 힘쓰니 / 礪操劬業
밝고 밝은 한결같은 마음이네 / 炯炯一心
하늘이 이미 공을 냈으니 / 夫旣生之
이룬 것이 있을 듯한데 / 若以有成
어쩌면 그리도 복이 없어서 / 云何不淑
하늘이 수명을 아꼈단 말인가 / 反嗇其齡
하늘이 착한 이에게 복을 내리는 것이 / 惟天福善
바로 떳떳한 이치이니 / 乃理之常
그 자손들이 / 宜其子孫
많고 또 착한 것은 마땅하도다 / 旣多且臧
볼록하게 솟은 봉분에 / 宰如之丘
수척 높이의 비석이 있으니 / 有碣數尺
여기에 명을 새겨서 / 于以銘之
후인을 권면하노라 / 後人是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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