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진천읍 행정리 상모재(鎭川邑 杏井里 常慕齋)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진천군(鎭川郡)

진천읍 행정리 상모재(鎭川邑 杏井里 常慕齋)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5. 3. 19. 05:51

상모재常慕齋는 양성 이씨 교위공파 종중 사당이며, 이신백의 후손을 위한 사당이다. 진천읍 행정리 699-2번지에 위치하고, 2003년에 건립하였으며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상모재 마당에는 양성이씨와 관련된 여러 기의 비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득곤은 1587년(선조 20) 지금의 진천읍 행정리(杏井里)[일명 살구우물]에서 태어났다. 옛적에 행정리 입구에는 살구나무가 있었고 그 살구나무 밑에 물맛이 좋은 우물이 있어서 살구우물 또는 살구물이라 불리었다. 살구우물마을 자랑비에는 마을의 유래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향기 좋은 살구나무 아래 큰 우물이 있어 수량이 풍부하고 물맛이 뛰어나 마을 사람들의 식수는 물론이며 지나는 길손들의 휴식처였고, 특히 과거 시험 보러 갈 사람들이 이 우물에 살구꽃잎을 띄워 마시고 가면 반드시 과거에 급제한다는 말이 널리 알려져 살구우물이라 불렀다.” 이득곤은 양성이씨(陽城李氏) 16세손으로 자는 덕후(德厚), 호는 식파정이다. 본래 학문을 좋아하여 사서오경에 달통하여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당대의 식견 있는 많은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높은 학식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유받았으나, 광해군 때 혼탁한 정쟁에 몸담지 아니하고 향리에 은거하여 학문에 정진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고, 속세를 떠난 듯한 선경에 식파정을 짓고 제현문인(諸賢門人)들과 식파지의(息波之義)를 맺고 친교를 나누었다. 이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세가군자(世佳君子)요 상산진처사(常山眞處士)’라고 불렀다. 양성이씨의 시조 이수광(李秀匡)은 고려 문종 때 송나라에서 귀화해 온 사람이다. 이수광이 고려에 온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송과 빈번한 문화 교류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고려에 사신으로 와 화평 관계를 맺는 데 공을 세워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補國)으로 양성군(陽城君)에 봉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이수광의 후손들이 400여 년 전부터 진천군 진천읍 두건리에 텃밭을 일구며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오다가 두건리가 수몰된 뒤 행정리, 건송리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특히 백곡저수지 아래에 있는 행정리 주민 가운데 상당수가 양성이씨이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창신교위를 지낸 양성인 이신백은 충남 전의에서 태어나  이 곳 진천으로 입향한 입향조입니다.

 

열녀 양성이씨라 하여  연곡리 마을 입구에 비석이 서있습니다.

양성이씨 이원임의 행적을 보면 1884년 16세의 나이로 변종은에게 출가하여 초례일에 남편이 득병하여 사망하였음에도 친정과 주위에서 개가를 권유하고 종용하였음에도 강경하게 거절함은 물론 예를 갖추어 집을 다스리고 정숙하며 법도있는 생활을 하였다.어느날 밤 보쌈을 당하였으나 기지를 발휘하여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는 등 많은 역경과 힘듬을 극복하고 수절하였다.또한 제종질을 양자로 삼아 잘 가르치고 조상들의 제사를 잘 모시게 하였다. 26세인 1909년 관청으로 부터 표창을 받았다.

  

진천읍 연곡리 효자마을 입구에 있는 양성이씨의 열녀비

유계열은 개항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부이다. 유계열(柳癸烈)은 남편 이규창(李奎昌)이 전사하자 시부모를 위안하고 효성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시어머니가 괴질에 걸리자 매일 정화수를 떠 놓고 하늘에 기도하여 3개월이 지나자 차도를 보았다고 『진천군지』와 『진천향토지』관련항목 보기 등에 기록이 전하고 있다. 1902년 군수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1903년 2월 전국선행자표창위원회의 표창을 받았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