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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면 정방리전주최씨열녀각(安內面 正芳里全州崔氏烈女閣)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안내면 정방리전주최씨열녀각(安內面 正芳里全州崔氏烈女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5. 16. 19:41

 

 

 

 

 

 

 

 

 

 

 

 

 

 

 

 

정방리 정곡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정곡마을 회관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옥천군 안내면 정방리 정실이 마을 한 가운데에 최씨 열녀문이 있다.

옥천에 거주하는 유림들이 그의 정열로 나라에 상소하여 1883년(고종 20년) 2월 열녀로 정려하여 목조 2평의 열녀문을 세워서 전하고 있다.

열녀 최씨는 부호군을 지낸 정형준의 처로 성품이 정숙하며 온순하여, 그 말과 행실이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전형적인 우리나라 여성의 본보기라고 모두가 극찬하였다.

여성으로 갖추어야 할 단아하고 품위 높은 인품이 갖추어 있었고 학식도 뛰어나 현대말로 하자면 “여성 지도자”로서 여자의 도리를 다하였다.

최씨는 언제나 남편을 공경하고 순종하였으며, 남편이 한때 극심한 역경에 처하여 고생하고 있을 적에 최씨는 헌신적으로 나서서 남편을 구해냈다.

평소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나갔고, 자녀 양육과 교육에 모범적이었다.

그리하여 남편이 관직에 나아가 성심껏 일할 수 있도록 내조하였고, 자녀들을 훌륭히 교육시켜서 어머니로서의 도리와 책임을 다하였다.

이와같이 일평생을 남편을 위한 내조, 자녀를 위하여 헌신적인 노력,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선행과 적덕을 다한 전주 최씨의 행실을 길이 전하여

 만인의 귀감이 되게 하기 위하여 열녀문을 세우고 그 편액에는 이렇게 적어 전한다.

“烈女 嘉善大夫 行 龍驤衛 副護軍 鄭亨浚 妻 貞婦人 全州崔氏之閭”(열녀 가선대부행 용양위 부호군 정형준 처 정부인 전주최씨지려)

 

용양위....조선() 시대() 때 오위() 중()의 좌위(). 5대 문종() 1(1451)년에 베풀었는 데, 별시위()ㆍ대졸()이 이에 딸리며 중()ㆍ좌()ㆍ우()ㆍ전()ㆍ후()의 다섯 부()로 나누고, 경상도() 각 진()에 둠. 임진왜란() 뒤에 오위 병제()가 무너지면서 명목만 남아 있다가 26대 고종() 19(1882)년에 폐지()되었음

 

정방리는 원래 정곡리(正谷里)에 속해 있던 마을이며 후에 정곡(正谷)마을과 방곡(芳谷) 마을이 합하여 정방리(正芳里)가 되었다.
1739년 기록에 보면 정곡리(正谷里)라 하여 85호가, 1891년에는 113호가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안내면(安內面)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는데 이 정곡리는 지금의 정곡(正谷), 방곡(芳谷), 도이리(桃李里) 등 3개 마을을 관할하였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을 일제 정비하면서 정곡(正谷)과 방곡(芳谷)을 합하여 정방리라 하였고, 도리골(桃李里)을 따로 분할하여 현재에 이른다.
2007년말 현재 정곡리에 35호 82명, 방곡리에 46호 104명이 살고 있다.

정방리(正芳里)라 부르게 된 것은 두 마을을 합하면서 정곡리(正谷里)의 정(正)자와 방곡(芳谷)의 방(芳)자를 한자씩 합하여 정방리(正芳里)라 하였다.

정곡(正谷)은 “정실이” 를 한자화하면서 “정”을 바를 정(正)으로 “실”은 골짜기란 뜻으로 골곡(谷)을 써서 정곡(正谷)이라 하였으며, “정실”이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정착을 한 사람들이 연일정씨(延日鄭氏)이었기 때문에 “정실”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며 또는 산이 곧게 내려왔다는 뜻에서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에 정현준의 처 전주최씨열녀문이 있다.

방곡(芳谷)은 “방골”이라 불리었는데 고려 때 늑천 안선생이 이곳으로 귀양을 와 움막을 짓고 살다가 돌아가게 되면서 이곳 주민들이 인정 많고 덕성스러움을 기리 남겨놓기 위하여 덕행지미(德行之美)란 뜻으로 덕성스러울 방(芳)자와 골곡(谷)자를 써서 방곡(芳谷)이라 하였다 한다. 방곡은 도울 방 내칠 방 꽃다울 방자를 쓰기도 하였다고 한다. 방곡에서 동쪽 오덕리로 넘는 듬재(斗音峙)가 있다.
자연마을은 정실이(정곡)와 방골, 두개마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