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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면 도이리후율당(安內面 挑李里後栗堂)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안내면 도이리후율당(安內面 挑李里後栗堂)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5. 16. 20:25

 

 

 

 

 

 

 

 

 

 

 

 

 

 

 

 

 

 

 

 

 

 

 

 

이 후율당은 1588년 선조 21년 중봉 조헌선생께서 율곡, 이이를 사모하여 자기가 율곡의 후학임을 자처하고 자기의 호까지 후율이라고 하였으며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안내면 용촌리 밤티 마을에 서당을 짓고 이름을 후율당이라 하였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중봉선생은 이 후율당에서 의병을일으켜 1,700명을 규합하여 영규대사의 승병과 함께 청주를 수복하는 공을 세웠다. 후율당의 상량문에는 「後票靜庵孝子 退溪學一 昭昭在石潭任辰潭義兵多出是堂」이라 쓰여 있어 이곳에서 많은 의병이 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후 본 후율당이 헐어져 없어진 것을 선생의 제자들과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가 1864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고, 1977년 정화사업으로 완전 보수하였다.

이 건물은 목조 기와집이며 정면 삼칸 측면 한칸의 팔작집이며 앞에는 소슬삼문에 돌로 담장을 하였고, 삼문 바로 안에는 중봉선생의 충신문과, 그의 아들 완기의 효자정문이 삼칸 맞배집 안에 나란히 편액이 걸려있다. 이 후율당 안에는 1621년 광해군 13년에 판각한 항의신편 125매, 유림시판 10매, 그리고 선조대왕이 내렸다는 조서 1매가 보관되어 왔으나 금산의 칠백의총이 건립되면서 금산으로 이관하여 보존하고 있다.

 

도이리는 원래 정곡리(正谷里)에 속하였던 마을이었으나 후에 도이리(桃李里)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 기록에 보면 정곡리(正谷里)에 85호가 살았고, 1891년에는 113호가 살았다고 기록되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일제 조정 작업 시 “도리골”을 따로 떼어 도이리(桃李里)라 하였다. 2007년말 현재 51호 112명이 거주하고 있다.

도이리(桃李里)는 “도리골”을 한자화하면서 한글 발음대로 도리(桃里)라 썼다. 그런데 도리(桃里)란 뜻은 복숭아와 오얏이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진 사람을 비유한 말로 1864년 용촌리에서 후율당을 이곳으로 옮긴 후 어진사람이 많이 탄생하라는 뜻으로 도리(桃里)라 칭하게 되었다.

마을의 이름을 “도리골”이라고 불렀는데 원래는 “도리골”이 아니고 “다리골”이란 옛글로 “다리”가 “들”이란 뜻이 되므로 “다리골”은 마을 앞에 “들이 있는 골”이 되며 동대리에서 안내천이 마을앞 들판을 돌아간다는 주장도 있다. 즉 “다리”라 하면 흔히 해석하기를 내를 건너다니는 다리(橋)로 보고 있고 거의가 교(橋)로 쓰고 있으나 잘못된 해석으로 옛글에서 들(野)이 되는 것이다.

자연마을로는 양지말, 음지말, 못안골 등으로 나뉘어 지며 도이소류지가 있다.
후율당은 1584년 중봉 조헌선생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이율곡선생의 뜻을 계승하여 후진들을 가르쳤다 한다.

 

조헌

조헌(趙憲, 1544년 ~ 1592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유학자이자 경세사상가, 의병장이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본관은 백천(白川)이다.

[편집] 생애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난 조헌은 5살 때에 글을 읽는 등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효성이 있고 유순했다. 집은 가난하였으나 12세 때부터 김황(金滉)에게 시와 글을 배워 156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567년(명종 22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에 속하였다. 이후 정주(定州)교수로 3년간 있으면서 그곳 선비의 풍속을 일신시켰다. 파주 교수로 옮겨 성혼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니 성혼은 사양하면서 감히 사제 간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년) 홍문관 정자(正字)로 왕의 불공(佛供)이 옳지 않음을 말하다가 파면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의 문물과 제도의 따를 만한 것을 조목별로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후에 박사(博士), 호·예 2조 좌랑, 전적(典籍), 감찰 등을 거쳐 경기도 통진(通津) 현감으로 다스리다가 법을 어긴 궁노비를 취조 중 장살(杖殺)하고 부평에 귀양 갔다. 1581년에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고, 전라도사로 나가 소를 올려 연산군 때의 공안(貢案)이 민폐가 되므로 개혁할 것을 청하고 이율곡 등의 선비들과 친분을 유지하였다.

1582년에는 보은(報恩) 현감으로 소를 올려 노산군(魯山君 : 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할 것을 청했으나 모함을 받아 파면되었다. 1586년 조정에서 학제(學制)를 수정하고 각도 제독(提督)을 창설할 때 공주(公州) 제독이 되어 선비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앞장서서 실천하니 찾아드는 선비가 많았다. 이때 또 소를 올리는 한편 정여립(鄭汝立)의 행패를 따지고 공격하였으나 관찰사가 화를 두려워하여 여러 번 물리치므로 벼슬을 내놓고 옥천(沃川)으로 돌아갔다. 1589년에는 대궐에 엎드려 소를 올려 시정(詩政)의 장단점을 철저히 논하였는데 광론(狂論)이라 하여 3사(三司)의 배척을 받고 드디어 길주(吉州)로 귀양 갔으나 그해 겨울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다 하여 석방되었다. 이렇듯 조헌은 철저한 유교적 입장에서 많은 개혁안을 상소하고 정론(正論)을 폈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 등을 보내와서 명나라를 칠 것을 전달하여 임금과 신하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상소를 올려 겐소 등을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경하여 일본군을 대비할 책을 상소했으나 정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시골에 내려가 왜란에 대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영남곽재우(郭再祐),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호서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보은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였으나 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의 시기로 홍성 지방에 옮겨가서 또 의병 천여 명을 모집했다. 이때 일본군은 청주에서 진을 치고 있어 관군이 여러 번 패하였는데, 승장(僧將) 영규(靈圭)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여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등 전과를 세웠다.

곧이어 의주로 북상하기 전에,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흩어지고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게 되었다. 그때 당시 금산(錦山)의 왜군이 충청도 일대로 세력을 넓힐 기세라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영규와 함께 금산을 향해 가서 일본군에게 함락된 금산의 10리 밖에 이르렀다. 당초 호남 순찰사 권율(權慄)과 합세하여 적을 협공할 약속이었으나 권율로부터 그 기일을 미루자는 편지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왜군은 이미 조헌이 거느린 의병의 약점을 알고 역습해 왔다. 그의 군사는 역전 분투하여 왜군에게 많은 손해를 주었으나 많은 수를 대적하지 못하여 조헌과 7백의사가 전멸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을 회복하게 된다.

[편집] 사후

1604년(선조 37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1609년(광해군 1년)에 그의 사당에 '표충(表忠)'이라는 액이 하사되었으며, 1754년(영조 30년)에 영의정으로 추증, 문묘에 종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