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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면 도이리충신효자각(安內面 挑李里忠臣孝子閣)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안내면 도이리충신효자각(安內面 挑李里忠臣孝子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5. 19. 10:06

 

 

 

 

 

 

 

 

 

 

 

 

 

 

 

 

 

안내면 도이리 후율당 안에 위치한 중봉선생의 충신문과, 그의 아들 완기의 효자정문이다

 

조헌(趙憲 : 1544 ~ 1592)

조헌 본관은 백천이며 중종 39년(1544) 6월28일 김포군 서감정리에서 아버지 응지와 어머니 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여식, 호는 중봉·도원·후율이라 했고,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기 때문에 시호를 문열이라 하였다. 1565년(명조 20) 성균관에 진학하였으며 24세가 되던 해 문과에 급제하여 잠시 교서과의 부정자직에 있다가 곧 경주, 파주, 홍주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조헌은 파주목의 교수로 있을때 성혼, 이이와 교류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는 서인으로 지목되었고, 그의 생애에 많은 영향을 끼쳤었다.

1572년(선조 5)교서관 정자로 있을 때, 왕이 절에 향을 내리는 것을 반대하다 삭직되었다가 곧 저작에 등용되고 1574년(선조 7) 성절사 박희립을 따라 명에 질정관으로 다녀왔다.

그 후 호조·예조의 좌랑, 감찰을 거쳐 통진현감이 되었으나 죄인을 장살한 일로 탄핵되어 2년간 부평에 유배되었다. 1581년 공조좌랑·전라도 도사·종묘서령을 지내고, 1582년 부모 봉양을 위해 보은현감으로 나갔다.

1586년에 공주 제독관이 되었는데, 동인이 이어·성혼등에 추죄하려하자 이를 반대하는 만언소를 올리고 고향인 옥천으로 돌아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이 되어 기개를 마음대로 펴보았던 조헌은 마침내 금산 벌판에서 49세를 일기로 장렬한 죽음을 맞이 하였다.

조헌의 시신은 옥천으로 옮겨져서 장례를 지냈고, 이해 12월에 무계 성혼의 상소에 의하여 조정에서는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영춘추관 의금부사의 벼슬을 추증했고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선무원종 일등공신에 봉하였으며 그 부친과 함께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그의 묘소는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 있다. 1656년 신도비를 세웠는데 청음 김상헌이 글을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옥천의 표충사, 금산의 성곡서원, 보은의 상현서원 등에서 그의 충절을 받들어 제향하고, 금산에는 비를 세웠으며 7백의총이 있다.

그의 저서로는 『중봉집』『중봉동환봉사』가 있다. 그는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와 함께 임진사충신의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