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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박물관 구경하기/원주박물관(原州博物館) (13)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석불은 2구입니다. 각각의 전체 높이 약 2.15m.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호. 원래 원주시 중앙동 폐사지(廢寺址)에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남산 추월대로 옮겨 놓았다. 그 뒤 1962년 5월일산동 5층석탑(강원도유형문화재 제5호)을 중심으로 좌우에 1구씩 옮겨 놓았다. 광배(光背 :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둥근 빛)는 2구 모두 잃었다. 불두(佛頭) 역시 2구 모두 현재의 자리로 옮길 때 새로 조성한 것이다. 2구의 불좌상은 불의(佛衣)의 옷주름과 상대(上臺)의 연꽃무늬 등 몇 곳을 제외하고는 동일하다. 적당한 넓이의 어깨에는 통견(通肩 : 어깨에 걸침)의 불의가 걸쳐져 있다. 두께가 비교적 얇아 신체의 양감(量感)이 잘 드러난다..
전체 높이 1.75m(대좌의 노출 부분만 포함).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8호. 얼굴과 손의 파손이 심한 것을 제외하고는 광배(光背 :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둥근 빛)와 대좌(臺座)까지 모두 갖춘 완형의 석불좌상이다. 얼굴은 떨어져 나가 형태를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목에는 삼도(三道)가 선명하다. 적당한 넓이의 어깨에는 통견(通肩 : 어깨에 걸침)의 불의(佛衣)가 걸쳐져 있다. 그리고 왼쪽 어깨에는 불의를 고정시키는 고리 장식이 있다. 이 작품은 머리·양어깨·양 무릎을 잇는 선이 이등변 삼각형을 이루는 비교적 안정감 있는 신체 비례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팔·다리 등 신체 각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양감(量感)과 탄력감 등에서 통일신라..
원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는 보살상입니다. 보관을 쓴듯한 모양으로 굵은선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화단담에 기대여 전시하여 놓았습니다.
원주박물관에 자리하고 있는 철불입니다. 이 불상은 일제강점기까지 원주시의 학성동 들판 노천에 다른 4구의 철불과 함께 방치되어 있던 것을 수습한 것이다. 앉은 상의 전체 높이는 110cm로 등신대(等身大)에 가깝다. 얼굴과 상·하체의 비율은 적절하고 안정감이 있으나 삼도가 표현된 목이 길고 가늘게 조성되어 다른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인상을 준다. 얼굴은 타원형이고 나발이 표현되어 있다. 이목구비도 특이하다. 우선 미간은 약간 넓고 눈은 옆으로 길게 표현되어 관자놀이 인근까지 이어져 있으며, 코는 콧방울 윗부분에서는 가늘게 시작하지만 아래로 내려올수록 넓어지면서 콧방울이 펑퍼짐하게 퍼지는 모습이다. 때문에 눈썹이 이루는 곡선과 코의 윤곽이 이루는 곡선이 자연스럽게 하나처럼 이어져 있다. 턱은 바짝..
원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석인들의 모습입니다. 석인(石人)은 석수(石獸)와 함께 능묘를 수호하는 능묘 조각의 하나로, 외형에 따라 문인석과 무인석으로 나누어진다. 문인석은 일반적으로 공복(公服) 차림의 문관 형상을 하였다. 무인석은 갑옷과 무기로써 무장을 한 무관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능묘 주위에 석인을 배치하는 풍습은 중국의 전한대(前漢代 : 서기전 206∼서기 24)부터 시작된 것이다. 묘 앞에 석사(石祠)나 석궐(石闕)을 세우고 신도(神道)의 양쪽에 석인과 석수를 세워 묘를 수호하였다. 이러한 습속은 후한대의 후장(厚葬) 풍습에 따라 일반화되어 명·청대까지 계속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능묘 제도가 정비된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8세기 중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