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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부강면 노호리 (8)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부강면 노호리에 있는 암석군입니다. 노호리는 보성오씨의 집성촌으로 지금도 많은 유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의 바위가 탕건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탕건바위라고 부른다.지금은 흙으로 메워져높이가 상당히 낮아져 있지만 에전에는 높이가 2m 둘레의 크기가 5.12m의 크기였다고 한다. 1915년 3월 동중의관 오경수가술사 한산주를 불러다가 비를 세웠다고 한다. 비의 앞면에 "노호동천 오씨세국"(蘆湖洞天 吳氏世局)이라고 각자 되여 있다. 지금은 가옥이 들어서고 시멘트로 포장하면서 높이가 크게 낮아졌다.현재의 높이는 1.6m이다. 탕건바위앞에 바위를 말바위라고 부른다. 탕건바위와 거북바위가 있는 가옥의 안쪽에 들어서면 커더란 바위가 있다. 이바위를 거쳐 마을입향조인 월송 오유립의 묘소로 갈수가 있..
부강면 노호1리의 풍경입니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습니다. 노호리는 금강 유역에 위치한 마을이다. 남쪽에는 금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동쪽에는 철도가 지나간다. 자연마을에는 말미개, 매포, 묘기, 우무실, 가루개가 있다. 말미개는 마을의 산 모양이 말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묘기는 모기라고도 부른다. 우무실은 마을의 산세가 후미지고 무궁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가루개는 금강 가에 갈대가 많아 가루개, 갈호개라고 불린다.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에 속해 있다가,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으로 편입되었다.노호리[Noho-ri, 蘆湖里] (두산백과) 보성오씨의 노호리 입항조인 오유립의 묘지와 인봉비 그리고 탕건바위 말바위 두꺼비 바위둥이 있다.
부강면 노호1리 마을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보성오씨천(寶城吳氏阡)입니다. 천(阡)이라는 글자의 의미중에는 묘지로 통하는 오솔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보성오씨천(寶城吳氏阡)이라는 글자의 해석을 해보면 보성오씨들의 묘지를 가는 길이라고 직역을 할수 있다, 천(阡)은 문중의 묘..
오유립(吳裕立.1575-1658)은 초명이 효립(孝立)이고 자는 백원(百源)이며 호는 남산처사(南山處士)이다. 판관 오세양(吳世暘)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오경인(吳景仁)이다. 어려서 부터 학식과 문장이 탁월하였으나 광해군시기 벼슬을 단념하고 향촌으로 돌아왔다.이후에 청원군 현도면 시목리에 월송정(月松亭)을 지어 이 곳에서 가락을 붙여 시를 즐겨 읊었다.노호리 입향조이다. 신구 비석이 있으며 비석의 전면에는 월송처사오공휘유립지묘(月松處士吳公諱裕立之墓)라고 적혀있으며 후면에는 오유립의 행적이 기술되여 있다. 그는 오정립 오시립과 더불어 노봉서원을 건립하여 후학을 가르치고 향풍을 진작시켰으며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증직되였다. 그 후 산세가 좋은 금강가에 위치한 노호리에 정착하였다. 노봉서원은 대원군시절 철폐되여..
노호1리에 자리하고 있는 보성인 오상항의 묘지입니다. 묘지석의 전면에는 유명조선국증통훈대부승정원좌승지보성오공상항지묘(有明朝鮮國贈通訓大夫承政院左承旨寶城吳公尙恒之墓)라고 적혀있으며 후면에는 오상항의 행적이 기술되여 있습니다. 오상항은 오유립의 5남으로 노호리 가루개마을에 세거하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오상항이 노호리에 정착한 이후로 많은 인물이 배출되였다. 오상항의 아들인 17세 오진해(吳震海. 1648-1743)는 학문과 문장이 뛰여났으며 후에 가선대부 호조참의에 증직되였다.오진해의 아들인 18세오재대(吳再大)는 자가 군일(君一)이며 통덕랑에 제수되였다. 오제대는 2남을 두었는데 19세오중기(吳重基.1697-1767)와 오융기(吳隆基.1704-1773)이다. 둘다 모두 통덕랑에 제수되였다. 오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