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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손대창 효자문 (3)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막지리(莫只里)는 원래 안내면 막지리에 속해 있던 마을이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군북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의 기록에 보면 안내면 막지리라 하여 40호가 살았고, 1891년의 기록에는 46호가 살았다고 되어 있다. 1973년 7월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내면에서 군북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막지리라 부르게 된 것은 이 마을이 강가에 위치하여 포전(浦田)이 많아 보리농사를 많이 하였기 때문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이곳을 지나다 많은 보리밭을 보고 맥계(麥溪)라고 했다는 것. 이는 대대로 전해진 것으로, 막지리의 본래 지명은 맥계이며 일본인들이 일제강점기 때 편리한대로 썼던 막지(莫只)라는 지명보다 본래 지명을 되찾기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맥기,..
손대창(孫大昌, 1752년 영조 28~?)은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1752년(영조 28) 군북면 막지리莫只里 장고개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를 알았다. 숙종·영조 때의 명현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 1705~1768)의 제자로 학식과 덕망이 고명하여 유림의 추앙을 받았 으나, 부모 봉양을 위하여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어려서 스승 송명흠에게서 공부를 할 때, 다른 학생들은 모두 시원한 그늘에서 책을 읽었지만 그는 뙤약볕 아래에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스승이 그 까닭을 물으니 부모님 들이 뙤약볕 아래에서 일하고 계신데 자식 된 도리로 시원한 그늘에서 책을 읽을 수 없다 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하..
육지속에 섬이라는 막지리를 찾아 보기로 했다. 막지리 장고개에 위치하고 있는 밀양인 손대창의 효자각도 볼겸 길을 나섰다. 답양리로 들어서는 고갯길이 가파르다. 인적없는 도로를 달리다 보면 장고개에서 손대창 효자문을 만날수 있다. 효자문을 뒤로 하고 길을 재촉하면 깨끗하게 잘 정리된 막지리 마을을 볼 수있다. 막지리(莫只里)는 원래 안내면 막지리에 속해 있던 마을이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군북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의 기록에 보면 안내면 막지리라 하여 40호가 살았고, 1891년의 기록에는 46호가 살았다고 되어 있다. 1973년 7월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내면에서 군북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막지리라 부르게 된 것은 이 마을이 강가에 위치하여 포전(浦田)이 많아 보리농사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