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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원주박물관 (6)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원주 일산동 삼층석탑 이탑은 기단의 덮개돌과 사찬왕상이 조각된 1층 몸돌만 남아있던 것을 2003년 9월9일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이 석탑의 부재인 기단의 덮개돌과 1층 몸돌은 일산동 제일감리교회에 있던 것을 옛 원주군청사로 옮겼다가 200년 원주역사박물관 야외로 옮겨 전시하고있다. 원래 이 탑이 있었던 제일감리교회 터에는 많은 기와조각과 석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름과 규모는 알 수 없으나 격식을 갖춘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층 몸돌의 들어난 네면에는 불교의 이상세계를 지켜주는 사천왕상이 돋을 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윗면에는 사리를 넣어 둔 둥근 홈이 파여져 있다. 원래의 부재들은 고려시대에 세워진 삼층석탑의 것으로 보여진다.
일산동 옛원주군 청사(강원감영)와 원동 남산에 있었던 석조물 부재로 2000년과 2006년에 각각 원주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이다.일산동 석조불이 감영으로 옮겨지기 전에는 제일감리교회터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석탑부재와 불상의 조성양식으로 보아 모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은 2구입니다. 각각의 전체 높이 약 2.15m.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호. 원래 원주시 중앙동 폐사지(廢寺址)에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남산 추월대로 옮겨 놓았다. 그 뒤 1962년 5월일산동 5층석탑(강원도유형문화재 제5호)을 중심으로 좌우에 1구씩 옮겨 놓았다. 광배(光背 :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둥근 빛)는 2구 모두 잃었다. 불두(佛頭) 역시 2구 모두 현재의 자리로 옮길 때 새로 조성한 것이다. 2구의 불좌상은 불의(佛衣)의 옷주름과 상대(上臺)의 연꽃무늬 등 몇 곳을 제외하고는 동일하다. 적당한 넓이의 어깨에는 통견(通肩 : 어깨에 걸침)의 불의가 걸쳐져 있다. 두께가 비교적 얇아 신체의 양감(量感)이 잘 드러난다..
원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는 보살상입니다. 보관을 쓴듯한 모양으로 굵은선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화단담에 기대여 전시하여 놓았습니다.
원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석인들의 모습입니다. 석인(石人)은 석수(石獸)와 함께 능묘를 수호하는 능묘 조각의 하나로, 외형에 따라 문인석과 무인석으로 나누어진다. 문인석은 일반적으로 공복(公服) 차림의 문관 형상을 하였다. 무인석은 갑옷과 무기로써 무장을 한 무관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 능묘 주위에 석인을 배치하는 풍습은 중국의 전한대(前漢代 : 서기전 206∼서기 24)부터 시작된 것이다. 묘 앞에 석사(石祠)나 석궐(石闕)을 세우고 신도(神道)의 양쪽에 석인과 석수를 세워 묘를 수호하였다. 이러한 습속은 후한대의 후장(厚葬) 풍습에 따라 일반화되어 명·청대까지 계속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능묘 제도가 정비된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8세기 중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