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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면 행촌리경석조공적비(延豊面 杏村里慶錫祚功績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연풍면 행촌리경석조공적비(延豊面 杏村里慶錫祚功績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7. 22. 11:11

 

 

 

 

 

 

 

충북 지역에서 일제에 저항한 인물로는 경석조[1881~1957]를 들수있다.

경석조는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자 국내에서 저항운동에 참여하다가

1924년 만주 길림으로 탈출하여 각종 애국단체에 참여하여 항쟁하다가 해방 후 환국하였으며

1949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의 책임자로 활약했다.

1991년에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연풍면 행촌리 치안센타앞 동산아래 공적비가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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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의]
  • 청주경씨에 대하여

    충청북도 청주에 본관을 둔 성씨.

  • [연원]
  • 시조는 청주인 경진(慶珍)으로 고려 명종 때에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냈으며 그 아들인 경대승(慶大升)은 청렴한 인물로 장군이 되어 정중부의 횡포정치를 제압하고 쇄신정치를 하였다.

    청주경씨의 1세(世)는 경번(慶蕃)으로 고려 고종조에 문과에 올라 호부상서평장사에 이르고 청주에 세거하였으며 2세는 경유(慶緌)로 통례문사를 지내고 3세인 경사만(慶斯萬)은 우대언(右代言)이었고 4세 경복흥(慶復興)은 벼슬이 문하시중에 오르고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청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 [세거지]
  • 청주경씨의 후손들은 21개 분파를 형성하여 전국에 분포하였으며, 청주 근교의 세거지는 다음과 같다.

    징군파(徵君派)는 괴산군 청안면, 서봉공파(西峯公派)는 청원군 문의면, 월송공파(月松公派)는 충주, 적성공파(積城公派)는 음성군, 경역공파(經歷公派)는 청주, 아산공파(牙山公派)는 청주·충주, 낭성군파(浪城君派)는 충주, 보성공파(寶城公派)는 괴산군 연풍면이다.

  • [인물]
  • 청주경씨는 단본으로 고려시대에 경대승을 비롯하여 경유, 경사만, 경복흥(慶復興)[?~1380], 경보(慶補), 경의(慶儀) 등이 있고, 조선시대에도 경준, 경세창, 경수공, 경혼, 경섬, 경취 등 14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으며 충효와 절의의 인물을 배출한 가문이다. 일제에 저항한 인물로는 경석조[1881~1957]와 경권중[1871~1919]을 들 수 있다.

    경석조는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자 국내에서 저항운동에 참여하다가 1924년 만주 길림으로 탈출하여 각종 애국단체에 참여하여 항쟁하다가 해방 후 환국하였으며 1949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의 책임자로 활약했다. 1991년에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경권중은 1907년에 의병을 규합하여 전남 구례, 곡산 등지에서 왜병과 항전하였으며,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소수면에서 군중 궐기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 가출옥 후 사망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 되었다.

    청주경씨는 2000년 전국인구조사표에 의하면 3,462가구에 11,128명이다.

  • [묘역]
  • 청주경씨의 선대 묘역은 상당구 지북동 산 32-2번지 모산(茅山)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1세 경번, 2세 경유, 3세 경사만의 묘가 있으며 장군공 경대승의 추원단(追遠壇)이 있다. 그리고 경내에는 사묘(祀廟)인 영모재(永慕齋)와 세적비각(世蹟碑閣)이 있다.

    경연(慶延)청주 모산 출신으로 세조·성종 연간에 그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향촌교화에 귀감이 되었다. 1478년(성종 9)에 정려되었으며 1686년(숙종 12)에 세운 효자각이 청원군 남일면 효촌리에 있다. 묘역도 청원군 남일면에 있으며 상당구 금천동에 있는 신항서원(莘巷書院)에 배향 되었다.

     


    1〕한일합방(韓日合邦) 후 항일운동에 투신하다

     〔보성공파, 23세〕고종 18년(1881)에 출생, 자(字)는 양건(陽建), 호는 혜춘(惠春)

    으로 학생공 운중(雲重)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합천 이씨(李氏)이다.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유하리 출신으로 1910년(융희 4) 8월, 한일합방조약

    (韓日合邦條約)이 체결되자, 1914년 정소(鄭簫), 채기중(蔡基中) 등의 동지와 함께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동지들을 규합하다가 왜경(倭警)에 체포되었다.

     

      1919년 3.1만세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천도교의 손병희(孫秉熙) 선생과 연락하여

    충북 각지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리도록 촉구하는 한편, 대동단(大同團)을 조직하여

    충청북도 지단장으로 활동 중 왜경에 체포되었다.

     

     1920년 8월, 미국 의회시찰단(美國議會視察團)이 내한하였을 때에 정인옥(鄭寅玉),

    노병희(盧秉熙) 등의 동지와 같이 조선의 실정을 비밀리에 전달하였다가, 발각되어

    다시 왜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1년에 상해(上海)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의 명령을 국내 각지에 시달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연통제 사건>으로 피체되었다. 같은 해 11월 5일

    12시를 기해 전국 각지의 경찰서를 습격하여 한민족(韓民族)의 배일사상과 독립의

    열망을 세계만방에 호소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임시정부 밀사(密使)

    이춘구(李春求), 황정연(黃正淵) 등 제씨와 함께 왜경에 체포되었다.


    〔2〕만주(滿洲)에서 항일운동(抗日運動)을 하다

      (1) 1924년 4월, 왜경의 감시(監視)가 심해지자, 만주로 건너가 길림(吉林)에서

    정안립(鄭安立) 동지와 같이 고서연구회(古書硏究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이범석), 이청천, 김좌진 등 제씨와 같이 17개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고, 핵심요원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정소(鄭簫),

    채기중(蔡基中), 박상진(朴商鎭) 등의 동지와 함께 북만주에 둔전병을 양성하였다.

     

      (2) 1928년 신민부(新民府) 중앙인민위원장으로 활동할 때에 <장개석>과 염석산

    (閻錫山) 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독립군을 동원, <염석산>의 후방을 교란시켰다.

    이로써 <장개석>이 중앙정부를 장악한 후 임시정부 활동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되었다.

     

      (3) 1929년 상해 임시정부의 홍진, 이청천, 이범석 등 제씨와 한족자치연합회를

    결성하고, 총무부장(總務部長)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7월 2일에 일어난 만보산사건

    (萬寶山事件)을 일제(日帝)가“조선인(朝鮮人)이 하였다”고 허위 선전함으로서 한중

    (韓中) 두 민족 사이를 이간시키려 했다. 이때에 한국독립당 기밀부장(機密部長)으로

    있던 公은 <장개석>과 긴밀히 연락을 하여 한중(韓中) 두 민족 간에 야기된 오해를

    불식시킴으로서 악랄한 일제의 흉계로부터 동포들을 구출하였다.

     

      (4)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이범석, 이청천, 홍진 등 제씨와 협의하여

    특별독립대(特別獨立隊)를 편성하고, 중국인 왕윤(王倫), 유만괴(柳萬魁) 군(軍)과

    연합하여 동북 만주 일대에서 항일(抗日) 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재만동지회

    (在滿同志會)를 조직하여 동만주 국경지역의 일본 경찰주재소와 헌병 분견대를

    공격함으로서 왜적에게 큰 타격을 주어 그들의 심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5) 일본의 패전)을 대비하여  중국 국민당에 가입한 후 만주 당책(黨責)인

    호종림(胡宗林)을 만나 일본은 한중국민(韓中國民)의 공동의 적(敵)임을 강조하고,

    항일전쟁에 합작협력을 시현시키는데 진력하였다. 이로써 일본이 패전하였을

    왜인에게 원한을 가진 만주인들로부터 동포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미리 방비책을

    강구하였다.


    〔3〕해방 후 귀국하여 건국(建國)에 참여하다

     (1)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의 패망으로 조국의 광복(光復)이 이루어지자, 하얼빈에서

    한국혁명 군사단(韓國革命軍事團)을 인솔하여 급거 환국하였다. 그런 후 임시정부

    인사들과 협의, 광복군지대(光復軍支隊)로 재편, 최고고문으로 취임하여 국군창설

    (國軍創設)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2) 1947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감찰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일부 간부들이 남북협상을 추진하자, 이는 백해무일리(百害無一利)하고,

    당정강(黨政綱)에도 위배된다는 사실을 지적한 후 탈당하였다.

     

      (3) 1948년 9월, 제헌국회에서“반민족행위처벌법(反民族行爲處罰法)이 제정되고,

    이듬해 2월 25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이때에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충청북도위원장에 피선(被選)되었다.

     

      公은 반민족 행위자를 색출, 처벌함에 있어서 어떠한 압력과 금력에도 결코 굴하지

    아니하고,“가을의 찬 서리와 여름의 뜨거운 태양처럼 엄(嚴)하게 다스렸다.

    그러나 생존(生存)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과오에 대하여는 관용을 베풀어서

    일일이 힐난치 않으니, 도민(道民)들이 공의 처사에 모두 탄복하였다.

      1957년 4월 7일에 77세를 일기로 별세하니, 충북 괴산군 연풍면 적석리 한평 선영

    (先塋) 아래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한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쳐 대한민국 건국(建國)에 이바지한 공로로

    1977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追敍)하였다.

      公의 행장은 항일운동(抗日運動) 동지였던 전임(前任) <만주신흥군관학교> 교관

    김상덕(金相德) 선생이 지었다. 공적비(功績碑)는 지역 유지(有志)들과 종친들이 公의

    애국하신 뜻을 기려 추모회를 조직하고 기금(基金)을 모아 公이 태어난 향리에

    세웠으며, 비문은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이 지었다.

     《出典》충청북도 인물지, 청주경씨 을유보(하권 p150), 청주경씨 선세행장록(p421)...청주경씨카페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