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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보면 수회리 서유돈선정불망비(水安堡面 水回里 徐有惇善政不忘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수안보면 수회리 서유돈선정불망비(水安堡面 水回里 徐有惇善政不忘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12. 15. 13:49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수회리에 있는 조선 후기 연풍현감 서유돈의 선정불망비이다.

 

서유돈이 1798년 사망한 후 그 이듬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유돈 선정비가 위치한 수회리는 1476년(성종 7) 이후 연풍현에 속했던 지역으로, 충주목과의 현계(縣界)에 해당되는 곳이다. 다만 서유돈 선정비를 현청(縣廳)이 있던 연풍향교 앞에 건립하지 않고 현계에 해당되는 곳에 건립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이 지역은 수회참이 있던 곳이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영남대로의 축에 있었던 길목이었기에 이곳에 건립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참(站)이라는 것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공문을 전하는 사람이나 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역(驛)과 역의 중간에 설치했던 건물이나 제도이다.

 

국도 3호선을 따라 충주에서 수안보 방향으로 진행하다 보면 수회리 외곽의 수안보 하수 처리장 앞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

야산에 위치하고 있으나 서유돈의 선정비는 접근은 용이하다. 녹음이 우거질때를 피해서 봄이나 겨울에 오르는것이 좋타.

 

길이 73~132㎝, 너비 99~142㎝ 크기의 자연석 한 면을 깎아 평평하게 한 후 높이 100㎝, 너비 31.5~37.5㎝ 크기의 장방형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해서체로 음각하였다.

비석을 정교하게 만든 편이 아니고 관리도 전혀 안 된 상태로 자연에 노출되어 있어 마모가 심한 편이나 깊게 음각을 하여 내용을 알아 볼 수 있다. 9×9㎝ 크기의 단정한 해서체로 ‘현감서공유돈선정불망비(縣監徐公有惇善政不忘碑)’라 음각되어 있다.

서유돈의 공적비는 서유돈의 사후인 정조23년 기미년(1799년)2월에 새긴것으로 음각되여있다.

 

수안보면 수회리 속칭 마당바위는 동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다. 서유돈 선정비가 위치한 곳은 자연 암석에 그 앞쪽이 작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어 쉼터를 연상시킨다. 주변은 영남대로가 지나는 곳으로 현재 석축이 쌓인 폭 2~3m의 도로가 명확히 구분되고 있고, 주막거리 흔적과 마방 터로 추정되는 곳도 있다.

 

서유돈선정불망비가 새겨진 바위를 동네사람들은 마당바위라 부른다

마당바위가 위치한 곳이 풍수지리로 따져서 갈마음수형 중 말머리에 해당하는 길지라고 한다

 

마당바위에 관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예전에 피붙이 하나 없는 부부가 아들 하나를 두고 석문천의 마당바위 근처에 집도 없이 동네에서 구걸을 하며 연명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죽고 말았다. 워낙 가난해서 장사 지낼 형편이 못되었다. 부인은 마당바위 왼편 따뜻한 곳에 남편의 시신을 묻었다. 남편의 시신을 마당바위 옆에 묻은 후, 부인의 건강이 좋아져서 남의 일도 도와주고 하면서 형편이 나아지게 되었다. 아들도 똑똑하여 객지로 나가 자수성가하였다. 부인이 갈마음수형 명당 터에 남편의 묘를 썼기 때문이었다. 그 곳이 갈마음수형 중 말머리에 해당하는 길지라고 전하고 있다. 

 

비의 주인공인 서유돈은 대구서인으로 31세에 등과하여 39세에 요절하였기에 관적(官績)이 보잘것없지만 이 지역에서는 많이 볼수없는 마애비며 이 지역을 재 고찰할 수 있는 자료이므로 유적으로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참(站)이란

〈고려사〉 병지(兵志) 참역조에 역제에 관한 기사가 적혀 있듯이 참은 역과 같은 의미로도 쓰였다. 우리나라의 역제는 고구려나 신라의 경우에서 확인되듯이 삼국시대에 이미 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도 역 운영을 위한 관리부서가 설정되어 있었다. 고려초에 전국을 22개 역도(驛道)로 나누고 거기에 525개소의 역을 소속시켰으며 6과로 등급을 매겼다. 원간섭기에는 원나라가 역참설치를 강요하기도 했고 그 영향으로 참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참에는 육참과 수참이 있었다. 육참은 말과 소나 수레를 이용했고, 도보로 가기도 했다. 수참은 배를 이용했다. 조선시대에도 이를 계승하여 운용했다. 각 참마다 아록전 5결씩을 지급하여 경비에 충당하도록 했다. 이렇게 역과 참이라는 이름은 혼용되었으며 대체로 역제를 그대로 참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 군사상 필요에 의해 종래의 제도를 고쳐 파발(擺撥)을 두게 되었으며, 또 변방의 소식을 중앙에 빨리 전달하기 위해 전국에 발참(撥站)을 증설하여 역과 구별했다. 이 제도에 따라 기발(騎撥)의 경우는 25리마다 1참을 설치하고, 참마다 발장(撥將) 1명, 군 5명, 기 5필을 두었다. 보발(步撥)30리마다 1참을 두어 참마다 발장 1명, 군 2명씩을 두었다. 참과 참 사이의 거리는 역과 역 사이의 거리와 거의 같았다. 파발로는 서발, 남발, 북발의 3대로를 중심으로 정비되었다. 경성-모화관-금천-의주의 서발(西撥)이 38참, 경성-양주-철원-경흥의 북발이 64참, 경성-광주-충주-동래의 남발이 34참이었다. 그러나 이 136개소의 발참이 모두 신설된 것은 아니고 상당수는 기존의 역이 그 임무를 대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