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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박진장군묘(漣川郡 百鶴面 斗日里 朴晉將軍墓) 본문

전국방방곡곡/연천(漣川)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박진장군묘(漣川郡 百鶴面 斗日里 朴晉將軍墓)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2. 1. 18. 08:44

 

 

 

 

 

 

 

 

 

 

 

 

 

 

 

 

 

 

 

 

 

 

 

 

 

 

 

 

 

 

 

 

 

위치 및 지형

 

박진장군묘는 백학면 두일리의 밀양박씨 선영내에 남서향하여 제일 상부에 위치한다. 

 

유적 현황

 

묘는 용미와 활개를 갖추고 있으며, 봉분은 원형으로 규모는 직경 700㎝, 높이 180㎝이며 봉분 전면에 혼유석, 상석, 4각 향로석이 있는데 향로석은 최근에 세운 것이다. 좌우에는 문인석이 2기 있으며 봉분 앞의 묘비가 있던 자리에는 장방형의 비좌만이 남아 있는데 비신은 후대에 손실된 것으로 보인다. 봉분좌측에는 근래에 건립한 묘비가 있다. 

박진장군(朴晉,1560~1597)은 조선 선조 때의 무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명보(明甫)이다. 무신집안 출신으로 비변사에 있다가 1589년(선조 22년)에 심수경(沈守慶)의 천거로 등용되어 선전관을 거쳐 1592년 밀양부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특히 1592년 8월 함락되어 왜군이 점령하고 있던 경주성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하여 탈환에 성공하였다. 비격진천뢰는 조선 선조때 이장손이 만든 폭탄의 일종으로 경주성 전투의 승리에 큰 역할을 하였다. 경주성 전투의 승리는 영남지역 수십 개의 읍이 적의 약탈로부터 면할 수 있게 하여 임진왜란 초기에 큰 의미를 지닌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그 후 장군은 전라병마절도사 황해도 병마절도사 겸 황주목사를 거쳐 참판에 이르렀다.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1736년(영조 12년) 의열(毅烈)의 시호를 받았다

 

 

박진(朴晋)에 대하여

1560년(명종 15)∼1597년(선조 30). 조선 선조 때의 무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명부(明夫). 박인수(朴麟壽)의 아들이다.
무신집안출신으로
비변사(備邊司)에서 무신으로 있다가 1589년 심수경(沈守慶)의 천거로 등용되어 선전관을 거쳐, 1592년에 밀양부사가 되었다.
같은해 4월 왜적이 침입하여 부산동래 등이 차례로 함락되는 와중에서 작원(鵲院)으로 나와 적을 맞아 싸우다 패하여 포위되자, 밀양부(密陽府)를 소각하고 후퇴하였다.
이후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나머지 병사를 수습하고, 군사를 나누어 소규모의 전투를 수행하여 적세를 저지하였다.

같은해 8월 영천의 민중이 의병을 결성하고 영천성(永川城)을 근거지로 하여 안동과 상응하고 있었던 왜적을 격파하려 하자,
별장 권응수(權應銖)를 파견, 그들을 지휘하게 하여 영천성을 탈환하였다. 이어서 안강에서 여러 장수들과 회동하고 16개읍의 병력을 모아 경주성(慶州城)을 공격하였으나 복병의 기습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한달 뒤에 군사를 재정비하고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하여 경주성을 다시 공략하여 많은 수의 왜적을 베고 성을 탈환하였다. 이 결과 왜적은 상주나 서생포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고, 영남지역 수십개의 읍이 적의 초략을 면할 수 있었다.
이와같은 전공으로
선조로부터 양피의(羊皮衣)를 특별히 하사받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당시 피난중에 행재소(行在所)의 호위문제를 중시하고 있었던
선조는 그의 전과를 감안하여 그를 불러올려 부원수로 임명해서 여러 장수들을 독전시키려고 계획하였으나, 조신들은 그가 각 도에서 두드러진 전과를 거두고 있고, 영남을 회복한 것도 그의 공이므로 민심을 고려할 때 불가하다고 상주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왜적과 싸운 장수 가운데 두드러진 인물의 하나였다.

1593년 독포사(督捕使)밀양울산 등지에서 전과를 올렸고, 1594년 2월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같은해 10월 순천부사, 이어서 전라도병마절도사, 1596년 11월 황해도병마절도사황주목사를 지내고 뒤에 참판에 올랐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1736년 의열(毅烈)의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