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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정면 지장리 정원택선생 공적비(佛頂面 芝莊里 鄭元澤先生 功績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불정면 지장리 정원택선생 공적비(佛頂面 芝莊里 鄭元澤先生 功績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2. 3. 2. 10:47

 

 

정원택은 독립운동가 입니다.

중원군 상모면(上芼面) 수회리에서 1890년 9월 27일출생하였다. 본관은 연일(延日), 호는 지산(志山)이다. 1903년 불정면(佛頂面) 지장리로 선산을 따라 이주하였다. 1910년 대종교(大淙敎)에 봉교(奉敎)하였고, 1911년 북간도(北間道)로 망명하여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 중국 청도에 도착하였다. 이후 독립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고, 같은 해 8월 계상중학교와 박달학원(博達學院)에 입학하였다. 상해조계 국제탐정 일경에 연행, 문초를 받기도 하였고, 1915년 안중근 전단 배포사건으로 일본영사관 탐정에게 체포되었다.

 

그 후 대한독립의용부를 조직하여 서무주장을 맡았으며, 선언문 작성에도 가담, 1918년 3월에 세계 각국에 밀송하고 파리평화회의에 전문을 보냈다. 1919년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 조직에 참가, 강화회의 인원 파견에 필요한 여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군자금 14,000원을 간도 노령(露領)에서 인수해오기도 했다. 그해 4월말에는 대한독립의군부의 지령을 받고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이동녕(李東寧) 등과 길림(吉林)·상해의 사정을 논의하였으며, 조소앙(趙素昻) 등과 임시정부 주비(籌備) 헌법초안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5월, 국내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접수, 재만동포선언서 2,400매를 인쇄하여 해외와 국내에 배포하는 일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신채호와 대한주보를 출간하였고, 7월에는 상해임시정부 길림성 대표 임정초대 의정원위원에 피선되었으며, 임시정부에 2,000원의 군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의정원 의원으로 제2회 회의에 참가, 자금 조달 및 비밀사명을 띠고 귀국하였으나 체포되어 경무총감부에 수감되었다. 1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병보석으로 풀려나 1925년부터 농촌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1946년 임시정부환영위원회 고문, 1949년 감찰위원장직을 위탁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이후 1960년에는 3·1 동인회를,1961년에는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1971년 11월 18일 별세하였다.정부는 1960년에 대통령표창,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애국장을 추서하였다.[지산외유일지]. 1911년 10월부터 1920년 2월 경까지 정원택이 국내외의 애국지사를 만나서 겪은 일들을 적은 글이다. 정인보 선생이 동제사에 가담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출처: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8],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4>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애국지사 지산정원택 선생 공적비」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에 위치한

독립운동가인 지산 정원택선생의 공적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