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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부면 하장리 익재영당(炭釜面 下長里 益齋影堂)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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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부면 하장리 익재영당(炭釜面 下長里 益齋影堂)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2. 7. 21. 20:41

 

익재영당(益齋影堂)은 탄부면 하장리 진미마을에 있는 익재(益齋) 이제현(李劑賢)의 영정을 봉안한 사우이다. 1504년(연산군 10) 후손인 눌헌(訥軒) 이사균(李思鈞)이 폐비 윤씨의복위를 반대하다가 이곳으로 부처(付處)되었을 때 건립하였다. 건물은 삼문까지 3동으로 전면에 “염수재(念修齋)”라는 재실이 있고 그 뒤에 영당이 있는데, 그 사이에 내삼문을 설치하고 담장을 둘렀다.

영당은 전면 2칸, 옆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익공을 달았으며, 그 안에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영정은 초상화로 정본이 아니라 묘사한 부본인데, 길이 165cm, 너비 96cm로 호상(胡床)에 좌측면관좌상(左側面觀坐像)이다. 정본은 국보 제 110호로 지정되어 있고, 이곳에 봉안한 영정은 충청북도지방 유형문화재 제 72호로 지정되었다. 1998년 도난을 당하였으나 이듬해 서울에서 발견되었고, 보관의 어려움이 있어 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으며 현재는 사본을 봉안하고 있다.

중문은 소슬삼문이며 재실은 목조 2층으로 정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집인데 1층 중앙에 출입문을 만들었다 “念修齋”란 현판은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글씨라 하며, 내부에는 “익재선생 영정각 증수기”가 걸려있다.

 

 

 

 

이제현은 성리학을 들여와 발전시켰으며 많은 시문을 남겼다.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실재(實齋)·역옹(櫟翁). 아버지는 검교정승인 진(瑱)이다. 1301년(충렬왕 27) 15세에 성균시에 장원, 이어 대과에 합격했다. 그해 대학자인 권보(權溥)의 딸과 혼인했다.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과 연경궁녹사를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314년(충숙왕 1) 백이정의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했고, 같은 해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나라 학자 요수·조맹부·원명선 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1319년 원나라에 갔다가 충선왕이 모함을 받고 유배되자 그 부당함을 원나라에 밝혀 1323년 풀려나오게 했다. 1357년 문하시중에 올랐으나 사직하고 학문과 저술에 몰두했다.

그는 탁월한 유학자로 성리학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충목왕 때는 개혁안을 제시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하기도 했다. 문학에 있어서는 도와 문을 본말(本末)의 관계로 파악하여 이들을 같은 선상에 두면서도 도의 전달에 상대적인 비중을 두는 문학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시는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루면서도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관계되는 충효사상·관풍기속(觀風記俗)·현실고발의 내용과 주제도 담고 있는데 영사시(詠史詩)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산문은 앞 시대의 형식 위주의 문학을 배격하고 내용을 위주로 한 재도적(載道的)인 문학을 추구했다. 〈익재난고〉의 〈소악부 小樂府〉에 고려의 민간가요를 7언절구로 번역한 17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고려가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의 저술로는 〈익재난고〉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 전한다. 경주의 구강서원과 금천의 도산서원에 제향되었고,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