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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면 청천리 송시열신도비(靑川面 靑川里 宋時烈神道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청천면 청천리 송시열신도비(靑川面 靑川里 宋時烈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2. 11. 12. 16:33

 

신도비는 청천면 소재지에 우암송시열의 묘아래 있다.

 

충청북도 지방기념물 제10호. 송시열(1607∼1689)의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영보(英甫)이며, 호는 우암(尤庵) 또는 화양동주(華陽洞主)로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635년(인조 13) 효종(당시 鳳林大君)의 사부(師傅)가 된 이후 사헌부장령·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효종 때는 북벌운동(北伐運動)을 주도하였으며, 서인·노론영수로 활약하였다.

신도비는 1779년(정조 3)에 어제(御製)로 세웠으며, 비신(碑身)의 높이는 250㎝로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의 보호각 안에 있다. 묘소는 신도비각으로부터 위로 300m지점의 산 중턱에 있는데, 본래는 수원(水原)에 있던 것을 1697년(숙종 23)에 지금 위치로 옮겼다.

 

신도비는 나라에 큰일이 있을때 땀을 흘린다는 속설이 있다.

주위는 깨끗히 정리되여 있다 .신도비옆에는 수령이 370여년 되는 은행나무가 신도비와 벗하고 서있다.

신도비를 뒤로 돌계단을 200여미터 오르면 송시열선생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이 비는 1779년(정조 3년) 충청북도 괴산에 건립된 송시열비(宋時烈碑)로 당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직접 비문을 지었고, 글씨는 당나라의 명필인 안진경(安眞卿)의 글자를 집자하였다.
송시열(1607~1689년)의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시호는 문정(文正)으로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주자학의 대가로 노론의 영수였다. 숙종 15년에 장희빈의 아들(후일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다가 사약을 받았다. 처음에 수원의 무봉산에 장사지냈다가 숙종 23년(1697년)에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로 이장하였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御筆」
有明朝鮮國左議政」
尤庵宋先生之墓」
御製」
公生于 大朙萬曆丁未獲末 命于 肅祖己巳是 崇禎紀元之六十有」
二秊也事我 仁祖 孝宗 顯宗 肅宗四朝官至議政府左議政謚文正學者」
稱尤菴先生腏食 文廟後又追配 孝宗室廟庭公夙契儒者之學凡於性命藴」
奧靡不潜究力賾外内交修動靜無間其用工也積累純熟其收效也剛毅精密又」
惓惓於春秋大儀以朙理正倫尊華攘夷爲己任嗚呼時則丁城下之羞惟我 孝」
宗大王寤寐英豪奮發有刷耻之念進公于朝廷寘帷幄 俯勤仔肩之託密勿訏」
謨外人莫有得以知之者公亦受 命屛營期效盡瘁之義而 仙馭遽昇 聖志」
未伸嗚呼所謂天實爲之謂之何㢤者非歟公墓以公遺意封前不立石後九十一」
秊己亥廷臣有言于寡人曰古帝王尙於勲舊躬爲之篆首况先賢之隧乎予乃書」
公碑面著爲文叙公之蹟嗚呼是謂有時存焉者乎又可謂有曠世之感也歟公名」
時烈系出恩津之宋少師文元公金長生長生之學自於文成公李珥云銘曰」
是惟文正之宅後之人其可式」
奉 教集唐顔眞郷字」
崇禎紀元後三己亥 月 日」

 

유명조선국좌의정 우암송선생지묘(有明朝鮮國左議政 尤庵宋先生之墓)
어제(御製)

공은 명나라 만력(萬曆) 정미년(선조 40, 1607년)에 태어나 숙종 기사년(숙종 15, 1689년)에 말명(末命 : 사약을 받음)을 받았으니 이 때는 숭정기원후 62년이다. 우리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네 임금을 섬겨 관직은 의정부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니 학자들은 우암선생(尤菴先生)이라고 칭하였다.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후에 또 효종의 묘정(廟庭)에 추배(追配)되었다.
공은 젊어서부터 유가(儒家)의 학문을 체득하여 성명(性命)의 심오한 이치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안팎으로 수양이 쌓였고 일동일정에 빈틈이 없었다. 그 공부를 함에는 오랫동안 쌓아나가 매우 익숙하게 하니 그 효과를 거두는 것이 매우 확고하고 정밀하였다. 또 춘추대의(春秋大義)에 대한 뜻이 매우 간절하여 올바른 도리를 밝히고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아! 이 때는 곧 성하(城下)의 치욕(병자호란때 남한산성아래 삼전도의 항복)을 당해서 우리 효종대왕은 자나 깨나 영웅호걸의 기상으로 분발하여 그 치욕을 씻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공을 조정에 나가게 하여 유악(帷幄 : 측근)에 두고 아래로 맡긴 책임에 힘쓰게 하였으니 그 기밀과 큰 계획은 두 사람 외에는 아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공도 또한 명을 받고는 조심하며 몸과 마음을 다하는 의리에 힘쓸 것을 기약하였는데 왕께서 갑자기 승하하시어 성스러운 뜻이 펴지지 못하였다. 아! 이른바 “하늘이 실로 한 일이니 어찌하란 말인가?”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공의 묘에는 공이 남긴 뜻에 따라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91년 후인 기해년(정조 3, 1779년)에 조정의 신하가 과인(寡人)에게 아뢰기를, “옛날 제왕(帝王)들은 공로가 있는 옛 신하를 기려서 친히 비석머리의 전자(篆字)를 하였습니다. 하물며 선현의 무덤에 대해서이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이에 공의 비면(碑面)에 글씨를 쓰고 글을 지어 공의 사적을 서술하니 아! 이른바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인가. 또한 광세지감(曠世之感 : 세월이 오래 지나간 감회)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공의 이름은 시열(時烈)이고, 은진송씨(恩津宋氏)이며, 젊어서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김장생의 학문은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에 명(銘)하노니,

이곳이 바로 문정공의 산소이니
후세 사람들은 공경할지어다.

하교를 받들어 당나라 안진경의 글자를 집자(集字)하였다.
숭정기원후 세 번째 기해년(정조 3, 1779년) 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