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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면 청천리 우암송시열묘소(靑川面 靑川里 尤菴宋時烈墓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청천면 청천리 우암송시열묘소(靑川面 靑川里 尤菴宋時烈墓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2. 11. 12. 18:46

청천면 시내를 지나다 보면 좌측으로 우암 송시열의 묘소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시내초입에 자리하고 있는데 일부러 찾으려고 하기전에는 그냥 지나치기가 쉽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도록 괴산군이나 충북도에서 더욱 신경을 써야 할것 같다.

 

신도비를 보고 신도비 뒷쪽으로 나있는 돌계단을 따라 오르노라면 은진송씨들의 묘역이 보인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것이 우암 송시열의 묘이다. 묘는 잘 단장이 되여 관리가 되고 있었다

묘앞부분이 조금 좁아서 묘를 정면에서 전체 사진으로 찍기가 힘들었다.

 

원래 묘소는 수원 무봉산에 있었으나 1697년(숙종23년)에 지금의 장소로 이장하였다.

신도비는 1779년(정조3년) 묘소 아래에 세운 것으로 높이 2.5m이며 신도비각 내에 있으며 비문은 정조의 어필로 알려져 있다.

 

 

 

 

우암 송시열은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우재(尤齋). 봉사(奉事)를 지낸 송구수(宋龜壽)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다. 어머니는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로서 선산곽씨(善山郭氏)이다. 1625년(인조 3)에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옥천 구룡촌을 찾으면 우암선생에 대한 유적지와 외할아버지인 곽자방의 충신문도 볼수가 있다.

송시열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나, 후에 회덕(懷德)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 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 『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 이이(李珥), 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였다. 1625년(인조 3)경부터 연산(連山)김장생(金長生) 문하로 들어가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일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약 1년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 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디지털대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