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진천읍 지암리 백허당부도(鎭川邑 芝岩里 白虛堂浮屠)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진천군(鎭川郡)

진천읍 지암리 백허당부도(鎭川邑 芝岩里 白虛堂浮屠)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2. 11. 27. 10:39

 

무슨 연유로 그 좋은자리 떠나서 저리 외로운 계곡한편에 넘어져 쓸쓸함을 만들어 내고 있는걸까?

조선중기까지 융성했던 지장사를 지키며 많은 사람들의 손길과 눈길을 받았을 백허당 부도가

누구의 욕심으로 무슨 연유로 저리 외롭게 방치되고 있는 걸까?

 

동네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어느스님이 당신의 절로 옮기기 위햐여 운반하던중 저리 되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동네주민이 맷돌을 만들기 위하여 운반하던중 그리 되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많은 이야기가 동네 경로당에 가득하다 

 

 

 

진천읍 지암리 지장골은 행정구역상 지암리 4구에 속하는 마을이다.동네이름이 지장골 또는 절안마을이라 불리우고 있다

지장골 뒤로 자리하고 있는산이 잠덕산인 듯 하다.이 잠덕산 중턱쯤에 지장보살을 모셨던 지장사라는 신라시대의 건립시기를 가지고 있는 절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네를 들어서며 오른쪽 언덕길을 통해 계속 길을 가다보면 사유지임을 알리는 철문이 자리하고 있다.

철문 못미쳐 조금 넓은 공터에 차를 세우고 사유지를 경유하여 잠덕산으로 오르면 된다.

 

지장사가 자리하고 있는 산이 사유지이며 또한 특용작물을 재배중이여서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고 팻말이 붙어있다

답사를 나선다면 주인이 있으면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지장사터를 찾기위해 산을 오르다 보면 지장사터 보다는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부도이다.

지장사터 부도는 전형적인 석종형부도로서 조선시대에 조성된것으로 추측된다.

부도의 상태는 양호하며 백허당(白虛堂)이라는 글씨가 눈에 띈다

 

 

 

부도는 묘탑을 가리키는 것이며, 묘탑은 사리를 봉안한 탑이므로 이와 같은 종류의 탑은 모두 묘탑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묘탑, 곧 부도라는 용어는 승려의 사리묘탑을 가리키고 있다. 진천의 지장사터 부도 역시 이 사찰과 관련 있는 고승의 부도탑으로 추정되지만 전하는 기록이 없어 정확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백허당(白虛堂)이란 음각된 글씨가 더욱 가슴속에 흘러든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지장골이라고 부르고 있어, 『상산지』에 나오는 잠덕산지장사 자리가 바로 이 곳 절터임을 알 수가 있다.

또 이곳은 조선 영조 때 성리학의 대가 봉암(鳳巌) 채지홍(蔡之洪)[1683~1741]이 다녀가다가

시 한 수를 지어놓은 것이 『상산지』『진천군지』에 전해온다.

 

채지홍이 지장골을 다녀가며 쓴 시이다.

시의 내용을 보면 채지홍이 다녀갈때에도 지장사는 페사한 상태인 듯 하다. 채지홍의 자취는 진천곳곳에 서려있다.

채지홍(蔡之洪)[1683~1741]은 지장골과 지척인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암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는데,

8세 때 “달이 동산 위에 떠오르니 그 모습이 태극과 같구나[月出東山上 形如太極初]”라는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0세 때 『주역(周易)』의 뜻을 이해하였고, 『서전(書傳)』의 ‘기삼백(碁三百)’까지 물었다고 한다

 

채지홍이 다녀갈때의 지장사터도 지금의 모습이였을까?

문득 그 시절의 채지홍이 되여 채지홍이 쓴 시를 읊어본다.

 

""임궁숙숙수운심(琳宮肅肅垂雲深) 일점니주만고심(一点尼珠万古心)

  굴지저두하소색(屈指低頭何所索) 명관응료거래금(冥觀應了去來今)

 

아름다운 옥궁은 조용하고 엄숙한데 상서(祥瑞)로운 구름이 서리었구나

한알 한알 움직이는 여승의 염주소리는 퍽 먼 옛적의 마음이로다.

손가락을 꼽으며 고개를 숙여본들 어디 가서 찾으리오

조용히 고금(古今)의 모습만 더듬어 볼 뿐이로다.

 

 

 

지장사터의 부도의 크기는 전체 높이가 180㎝, 직경 85㎝이며, 석종형 탑신 상단에는 보주형의 상륜이 모각되어 있다.

탑신 하단에는 백허당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기단석은 어디에 두고 저리 외롭게 이 계곡을 지키고 있는걸까?

 

 

 

 

부도의 탑신 한쪽에 ‘백허당(白虚堂)’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누구의 부도인지 백허당이라는 인물은 누구인지? 흐르는 세월만이 그 진실을 알고 있으려나.

 

 

 

 

지장사 터 부도의 본래 위치는 방치되어 있는 지금의 자리보다 100여 미터 위쪽이라고 한다. 장마 때 석종형의 탑신석이 굴러 내린 후 풀밭에 방치되고 있다고 이야기 하는데 동네주민들의 전하는 이야기로는 누군가 포크레인을 이용 반출을 시도하다 저리 되였다고 하는말이 맞는듯 하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적던 시절에 지장사터를 유지하고 있던 유물들이 하나하나 반출되고 지금은 반출이 힘든 크기인 맷돌과 부도만이

이런 모습으로 옛사지를 지키고 있는것은 아닐까 하는 사견이다. 


지장사터 부도명문에 따라 백허당부도라고도 불리며, 석종형을 하고 있으며 조금 단순한 느낌을 주지만 크기로 보아 매우 장대한 느낌을 준다.

 

 

지장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그 밖의 기록에도 보이지 않으나 영조때 봉암 채지홍(蔡之洪, 1683∼1741)이 지은 한시에는 사찰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 부도는 도괴되어 많은 부도편이 주위에 산재해 있고 사찰의 규모를 알려주는 맷돌이 출토되었는데 크기가 153∼163㎝로 거대하며 맷돌에는 “만력사년병자대화주신녀비구(萬歷四年丙子大化主信女比丘)□□□□”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 맷돌은 157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명문에 있는 여비구는 여승을 의미하고 봉암의 한시에도 이(尼)라는 용어가 보인다. 그러므로 여승의 가람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