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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백면 계산리 부도(文白面 溪山里 浮屠)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진천군(鎭川郡)

문백면 계산리 부도(文白面 溪山里 浮屠)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2. 10. 29. 22:50

 

계산리는 진천군 문백면에 위치하고 있는 동네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낙계리(洛溪里)의 ‘계(溪)’자와 산직리(山直里)의 ‘산(山)’자를 따서 계산리(溪山里)라 하였다.
조선 말기 진천군 백락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직리·낙계리·신리를 병합하여 계산리라 하고 문백면에 편입하였다.

 

 

 

부도골 이란다. 문백면 계산2리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부도골을 찾아드니 군데군데 축사가 자리하고 있다.

 

 

 

비지정문화재로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부도이다.

인삼밭이 있어 접근하기가 참 힘이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어려움을 해결해 주려는 듯 부도골을 찾은 날은 인삼을 모두 수확한 후였다.

인심 좋아 보이는 축사의 후덕한 아주머님에게 부도골의 부도의 행방을 알수가 있었다

 

 

 

원래 인삼밭이 경작되기 전에는 밭으로 사용되던 절터와 밭밑으로는 천수답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 축사의 아주머니가 이 땅을 사서 현재의 인삼밭을 만들때는 부도는 물흐르는 고랑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그 부도를 뭔가 중요한 듯 하여 포크레인을 이용해서 현재의 산기슭으로 옮겨 놓았다고 말씀을 해주신다'

현재는 절터로서의 유물등은 발견할수 없으며 유일하게 부도만이 절터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절터가 현재의 자리가 아닌 옆으로 작은 동산을 넘으면 구건사라는 절터가 있다고는 하는데 확실하게 알수는 없다.

부도는 언젠가 동네주민에 의하여 반출될 위기가 있었으나 당신의 저지로 현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아주머니가 말씀해 주신다.

 

 

 

진천읍 문봉리 부도(鎭川邑 文鳳里 浮屠) (tistory.com)

 

진천읍 문봉리 부도(鎭川邑 文鳳里 浮屠)

계산리 부도골에 있던 계산리부도는 그 곳에서 지금은 찾을수 없다. 아무리 찾아봐도 볼수가 없기에 진천군 문화재 담당자와 통화를 하니 후손들에 의하여 다른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온전한

king6113.tistory.com

 

 

 

가끔씩 부도를 보기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해 주신다.

군청에서도 나와 사진도 찍어가고 했다고 하는데 중요한것인가 보라고 말씀을 하신다.

 

 

 

 

전형적인 석종형 부도이다.

지대석은 결실된것으로 보이며 높이는 약 110센티이며 직경은 45센티 정도이다.

부도는 정교한 멋이 조금은 떨어지며 투박하며 서민적인 느낌의 부도이다.

 

 

탑신상부에는 연주문이 둘러져 있고 그 위에 마치 보주와 같이 불록하게 처리하였다

진주형태의 연주문(連珠文)이 상륜부에 자리하고 있는데 갯수는 약 32개 정도가 된다.

연주문위로는 연꽃문양의 무늬가 부도의 상륜부를 감싸고 있다

 

 

 

원래 진주는 영혼·광명·선(善)을 상징하는 것으로 왕관이나 의복의 장신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크게 유행했으며, 불상의 대좌 및 광배·금속공예·벽화·석조부조 등 불교관계 미술품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도 불교의 성행과 함께 불교공예품을 비롯하여 불상이나 도자기 등에 장식문양으로 많이 나타난다.

 

 

 

 

부도골이라는 명칭이 정식명칭은 아니겠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단지바위 또는 항아리바위 구전되면서 언제 부터인가 이 곳에 있는 부도의 존재를 나타낸 듯 하다.

부도골에 있던 절의 명칭은 구건사라고 전해지나 더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시대상황 등은 정확히 알수가 없다.

 

 

 

현재는 인적없는 골짜기 한구석에 나무들에 가려서 관리가 소홀하다.

진천군 차원에서 더 깊은 관찰과 보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