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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면 고마리 본문

내고장풍경화둘러보기/느티나무 괴산군

소수면 고마리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3. 4. 9. 20:26

 

괴산군 소수면 고마리 원당마을의 평화로운 풍경이다.

 

고마리의 명칭의 유래는

허후(許詡) 선생의 아들 허조(許造) 선생은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목숨이 위태로움을 깨닫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허조 선생의 시신을 가져다가 다시 형을 집행하면서 두 아들인 연령(延齡)도 모두 죽였다. 이때 셋째 아들인 정(精)은 태어난 지 15일밖에 안 되어 차마 형을 집행하지 못하고 15살이 되기를 기다려서 형을 집행하기로 하였다. 어느덧 정의 나이가 15세에 이르자 몇 명의 대신이 잊지 않고 정을 죽이자고 왕에게 전언하였다. 그러나 허후 선생에게 어쩔 수 없이 사약을 내렸던 세조는 ‘허후와 허조가 비록 죄를 짓고 죽었으나 그 죄가 흉악한 일이라 할 수 없고, 또 허후는 선조가 믿었던 신하이니 내 차마 그의 대가 끊기게 할 수는 없다. 후의 손자 정을 충청도 괴산으로 귀양을 보내도록 하라’고 명하여 어린 생명만은 구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정조가 죄를 면해줄 때까지 허정의 자손은 괴산 땅에 살면서 사정(思禎), 흥립(興立), 민(敏), 이충(以忠), 준(竣), 위(胃) 등 수많은 효자를 낳았으나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낼 기회는 없었다. 훗날 조정에서는 허후 선생 부자의 죄를 면하고 시호를 내린 뒤 그 묘에 청주, 충주, 괴산, 청안, 연풍, 문의, 음성 등 7개 읍의 장으로 하여금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또한 정조는 ‘허후는 본래 청렴결백하여 자신을 잘 지켰고 충성스런 말을 직접 아뢰어 미움은 받았으나 그 정신이 백이(伯夷)·숙제(叔齊)에 뒤지지 않았다. 허후가 말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叩馬而歸)’ 하였다. 그런 연유로 묘소가 있는 곳의 지명이 고말귀(叩馬歸)로 남아 있으나 묘와 함께 사당은 종손이 거창으로 옮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