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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면 사담리 공림사사적비(靑川面 沙潭里 空林寺事蹟碑) 본문
공림사 사적비는 조선 숙종 14년(1688)에 세운 것으로 공림사 경내의 선방건물 뒤편 언덕 아래에 있는데 사각형 지대석 위에 복련(伏蓮)이 조각된 화강암 비좌(碑座)를 놓고 높이 177cm, 너비 90cm, 38.5cm의 대리석 비신(碑身)을 세우고, 팔작지붕 모양의 비관(碑冠)을 얹었다.
비문은 4면에 모두 새겨있는데 정면에 있는 본문과 이어지는 문장이 아니며, 좌·우측면의 내용은 뒷면의 시주자 명단의 연속으로 보이나, 시주시기가 서로 다른 이들을 추가로 새긴 것으로 보인다. 비문의 찬자(撰者)는 석경일(釋敬一)이며, 허암(虛菴)이 쓰고, 조영(祖瑛)이 전(篆)했다.
비의 앞면에는 공림사의 유래와 연혁, 비의 건립경위 등을 적었는데 강희(康熙) 27년 3월에 썼으며, 나머지 3면에는 시주자, 승려, 주지, 각수(刻手)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사적비는 비문이 완전하여 조선중기의 사회상과 지역의 동태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2002년 1월 11일 충북유형문화재 213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괴산군청]
1688년(숙종 14년)에 충청도 청주(淸州) 낙영산(落影山)에 건립된 공림사(空林寺)의 사적비(事蹟碑)로, 석경일(釋敬一)이 비문을 찬술하고 조영(祖瑛)이 전액하였다. 공림사는 신라 경문왕(景文王) 때 자정 선사(慈淨禪師)가 창건한 절로, 사액(賜額) 사찰이다. 1399년(정종 1년)에 함허(涵虛)가 폐사(廢寺)된 이 절에 법당과 요사채를 새로 지어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때 여러 건물이 불타고 대웅전만 남았으므로 인조 때 다시 중창하였다. 공림사의 사적비 앞면에는 사찰의 유래와 연혁을 비롯해 사적비의 건립 경위 등을 적었고, 나머지 3면에는 시주자 · 승려 · 주지 · 각수(刻手)의 명단을 기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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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林寺事蹟碑 朝鮮國忠淸道淸州落影山空林寺事蹟碑銘 幷序 扶宗樹敎福國祐世運智興悲辯才無礙傳佛心印判曹溪宗事嗣祖沙門東溪釋敬一 撰幷書 曹溪宗虛菴 雲居無是翁衲祖瑛篆 夫道出離微聖匪夷夏是故孔老二聖降于東土 金僊佛日昇彼西抱皆於姬周之ㅡ成 並駕干右古今之天下其猶 日月星辰 合於扶桑之上 江河准濟滙於尾閭之淵 孔以仁義爲宗 老以道德爲旨 齊遊於六合之內 佛以眞淨無 爲昭箸惟心之道 兼仁義道德 而優遊於六合之內外論而 辯之明也 其道之慱始大象之包容 萬物其敎之廣比滄 海之呑 納百川撈摝群品籠象彙其說法也 天雨四華其入定地湧六端 人天釋梵請轉其法輪龍畵 彼以區區仁義 卒于七暴 國之間孑孑道德 橨世於五千言之內 以止己也 恭惟我覺皇遠繼燈明佛之道 於塵黑劫之前 應運娑 婆尊爲大千之主 還往四生之父其爲盛烈 豈人情之所能測哉 謹考其聲敎之東流也 則聿自周穆之世 己有化人 從西而飛來 潜爲其漸遹乎 東漢明帝夢金人邀沙門 葉騰 以來遂大被神州汎濫天下 如洪灑之走平陸猛吹揚大 虛 基沛然孰能禦而遏遹耶惟我邦邈在天之東郵得忝其至化之中其亦幸矣夫自鼎敎之風揚遂使四海名山大川勝 緊之鄕盡囿於佛界金銀之域致其金田玉剝棊布於華夷 遠近之郊 此所謂道之所存無所往 而不可者也 今玆落 影山空林寺者 在於西原府之東八十里 盖古伽藍也 其寺之異跡山之奇跡有六焉 昔在新羅景文王朝 有高僧慈 淨其道德餘馨聞于四遠 王欽而仰之邀致輩下拜 爲國師 加封壁上三韓上三韓三重大匡師視之 如鷄鶋鳥之聽魯 樂 即辭而遁結茆於此王聞之 爲建寶坊而俾居之賜其額曰空林云 後至明建文之世 有涵虛堂得通和尙測慕慈 淨之跡 重創其法堂及諸寮寀之屬一 以新之人口稱爲涵虛之道場 其寺之前後神聖之異跡一也 至天順中我世 祖大王 俯留意於禪門 親運玉趾特加聖旨 而完護之其拜軸 至今存焉 永爲山門之重寶寺之 爲古今人主之 所共重之者二也 寺之北有彌勒峯芙蓉萬丈上入雲 漢其項有大石石中有黃金密塔 其影落於中國洛陽都中 在 武德中唐高祖 使望氣者覘之即遺跟之 使至澄峰則只見石 而不見塔鑿其石項則果有之 迺拔其塔 遂丈六彌 勒佛像三軀 於石面而鎭之 即名其山曰落影焉 山之奇者三也 峰之跡有洞壑巖巒秀麗泉石娟明上下十里 皆爲 仙境而世謂之葩串 即山之奇者四也 寺之西有法華院災塏凌虛 即羅之神僧黔丹禪師與崔孤雲 講論蓮經之處 也 故黔丹山在其西 孤雲之臺在其下也 又有靑華孕秀於東離岳 誇雄於南而落影處 于兩名山之間得興慈淨涵 虛黔丹孤雲四人高名於宇宙之內 山之名勝者五也 至自歷丁壬之亂倭寇猝至畏 寺之神異不敢突入以火縱之 惟東西廊宇熱爲猥燼 其佛殿僧廬則風廻火滅盡免其載賊怒之 以簡亂射而去其鏑痕完在於沙門之柱 而如旺焉 此亦爲寺靈異之跡六也 然則今之所存堂宇則皆慈淨涵虛之所 曾經歷者非在亂後之人新所管者也 今有大德太 行爲供佛之計 以告諸檀越 即有善信君子二十餘人興比三人等 同發鴻願共拾畓而施於佛 爲萬世亨佛之需胡爲 小補哉 凡諸名監旣有遂銘其事 或頌其功德用圖久於世僭 謂之碑而其用 遂行一夕象集誘體心道人曰 噫此寺 乃慈淨涵虛兩聖師之道場 而曾無所紀之文古之奇跡 雖有人之口誦蜀 若借辭文口之手被之金石 以圖其固爾 其樹石 以賁古事無備今諸檀越之功也 於是曹溪宗長老祖瑛大德審 而喜之於丁卯口折簡 而走伴嶺南來諸誄 於予 予於瑛非獨有同風之慶 亦深其少年之契欲不負其所望 以樗櫟散其冬遣通政大夫釋應敏 而珿其文遂 不穫己就紓其來語强賊其銘曰 佛氏東邁周秦邦爰 及漢顯海印全彰濫彰觴家宇流冾扶葉粵 有慈淨法沫親甞不風問道 彼新羅王從其鳥養 爲創道場 涵虛緝古乃殿乃堂 世庙親幸山益增光蒼蒼落影 影唐落陽晃曜金塔胎石 而藏溪山明秀洞壑淸源中 藏寶所千古禪房 而山而寺六異流芳 有諸檀越信施 以農莊不怠供佛求福 知方跡被豊石遠示無彊浮雲 石衛卓 甫湲圖 康熙二十七年 三月 日 |
조선국(朝鮮國) 충청도(忠淸道) 청주(淸州) 낙영산(落影山) 공림사(空林寺) 사적비명(事蹟碑銘) 병서(幷序)
부종수교(扶宗樹敎) 복국우세(福國祐世) 운지흥비(運智興悲) 변재무애(辯才無礙) 전불심인(傳佛心印) 판조계종사(判曹溪宗事) 사조사문(嗣祖沙門) 동계(東溪) 석경일(釋敬一)은 글을 짓고, 아울러 쓰다.
조계종(曹溪宗) 허암(虛菴), 운거(雲居) 무시옹(無是翁) 납(衲) 조영(祖瑛)은 전액(篆額)을 하다.
대체로 도(道)는 세속을 초월한 것으로써, 모두 중원(中原)이나 오랑캐의 성인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와 노자(老子), 두 성인은 동쪽 땅에 내려오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의 광명은 저 서쪽 지역에서 떠올랐으나, 주(周) 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게 되자 모두를 오른편에 아울렀다. 고금의 천하는 마치 일월성신이 동쪽 바다 위에서 합하고 강수(江水), 하수(河水), 회수(淮水), 제수(濟水)가 미려(尾閭)의 못으로 모이는 것과 같다. 유가(儒家)는 인의(仁義)를 근본으로 삼고 도가(道家)는 도덕(道德)을 주된 뜻으로 삼아서 모두 육합(六合)의 안에서 노닐지만, 불교(佛敎)는 진정(眞淨), 무위(無爲), 소저(昭著), 유심(惟心)의 도로써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을 겸하고 육합(六合)의 안과 밖에서 노니니, 논하여 변론하는 것이 명확하다.
그 도가 넓은 것은 우주가 만물을 포용하는 것과 같으며, 그 도가 광대한 것은 창해(滄海)가 온갖 냇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비견(比肩)된다. 여러 사물을 찾아 취하여 물상(物象)을 감싸 안으니, 설법(說法)을 할 때면 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비 오듯이 내리어, 그 올바른 자리에 들어가서 육단(六端)이 샘솟는다. 인간계(人間界)와 천상계(天上界), 제석천(帝釋天)과 범천왕(梵天王)이 그 법륜(法輪)과 용화(龍畵)를 움직이기 청하였으나, 저 공자와 노자는 구구한 인의(仁義)로써 일곱 개의 포악한 나라의 사이에서 마치거나 외로이 남은 도덕경(道德經)을 오천 마디 안에서 세상을 판단하였으니, 이것으로써 그쳤을 뿐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각황(覺皇)께서는 재난이 닥치기 전에 부처의 도를 멀리 계승하여 밝히시고 사바세상에서 운명에 순응하여 넓은 세계의 존귀한 주인이 되셨으며, 다시 사생(四生)의 아버지로 돌아가셨으니, 그 성대한 공열(功烈)은 어찌 사람의 마음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삼가 그 대중을 교화하는 가르침이 동방(東方)으로 전해진 것을 상고해보건대, 주(周) 나라 목왕(穆王)의 시대에 이미 서방(西方)에서 날아온 화인(化人)이 있어 은밀하게 점점 전해졌고, 동한(東漢)의 명제(明帝)가 꿈에 금인(金人)을 보고 스님을 맞아들였으며, 섭마등(葉摩騰)이 와서 마침내 신주(神州 중국)에 크게 전해지고 천하에 범람하여, 마치 큰물이 평지에 달려가듯 하고 맹렬한 바람이 허공에 크게 일어나는 듯하니, 그 성대한 기세를 누가 막아서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건대, 우리나라는 멀리 하늘의 동쪽에 있지만 다행히 지극한 교화(敎化)가 전해지는 것을 얻을 수 있었으니 그 또한 다행한 일이다. 유불도(儒佛道) 삼교(三敎)가 널리 퍼진 뒤로 마침내 사해(四海)의 명산대천(名山大川)과 훌륭한 경치를 가진 고을이 모두 불계(佛界)의 귀한 지역에 포함되게 되었고, 금전옥답과 온갖 재물을 중국과 오랑캐, 원근(遠近)의 교외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도가 있으면 가는 곳마다 불가(不可)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낙영산(落影山)의 공림사(空林寺)는 서원부(西原府) 동쪽 80리(里)에 있는 옛 절인데, 그 절과 산의 기이한 자취가 여섯 가지 있다. 옛날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때에 자정(慈淨)이라는 고승(高僧)이 있었는데, 그 도(道)와 덕(德)이 높아 사방에까지 전해졌다. 왕이 흠모하고 우러러서 대사(大師)를 불러들여 예(禮)를 갖춰 국사(國師)로 삼아 벽상삼한상삼한삼중대광사(壁上三韓上三韓三重大匡師)로 봉(封)하였으며, 마치 계거조(鷄鶋鳥)가 노(魯) 나라의 음악을 듣는 것처럼 대우하니, 대사는 즉시 사양하고 숨어서 이곳에 초가집을 지었다. 왕이 이를 듣고 사찰을 세워 거처하게 하고, ‘공림(空林)’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그 후 명(明) 나라 건문제(建文帝) 시대에 이르러 함허당(涵虛堂) 득통화상(得通和尙)이란 분이 있었는데, 자정선사(慈淨先師)의 행적을 사모하여 그 법당(法堂)과 요사채 등을 다시 세워 하나같이 새롭게 하였다. 그곳을 사람들이 함허(涵虛)의 도량(道場)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그 사찰의 전후(前後)에 걸친 기이한 자취 중의 첫 번째가 된다.
천순(天順) 연간에 이르러 우리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선문(禪門)에 뜻을 두시어 친히 이곳에 행차하시고 특별히 성지(聖旨)를 내리시어 이곳을 보전하고 보호하라고 하셨으니, 그 당시 삼가 받은 문권(文券)이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영원히 산문(山門)의 중대한 보물이 되고 있다. 사찰이 옛날과 지금의 임금께서 함께 중요하게 여긴 바가 되었으니, 기이한 자취 중의 두 번째가 된다. 사찰의 북쪽에 미륵봉(彌勒峯)이 있는데 부용(芙蓉)이 만장(萬丈)이나 되게 치솟아 하늘 속으로 들어갔다. 그 꼭대기에 큰 돌이 있고 돌 가운데에 황금빛의 밀탑(密塔)이 있었는데, 그 그림자가 중국의 도읍 낙양성(洛陽城) 중에 드리워졌다. 무덕(武德) 연간에 당(唐) 나라 고조(高祖)가 조짐을 보고 점을 보는 사람에게 점을 치게 하고, 곧 사람을 보내 남은 자취를 추적하게 하였다. 그 사람이 징봉(澄峰)에 이르러 보니, 단지 돌만 보이고 탑은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돌의 윗부분을 뚫어보니 과연 탑이 있었으므로, 이에 그 탑을 꺼내었다. 드디어 몸이 육장(六丈)이 되는 미륵불상(彌勒佛像) 3좌(座)를 돌 표면에 안정시키고는 그 산의 이름을 ‘낙영(落影)’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산의 기이한 자취 중의 세 번째가 된다.
미륵봉은 깊은 계곡과 험하고 높은 봉우리가 있고 빼어난 물과 돌이 있어 아름다운 경치가 위아래로 10리(里)에 펼쳐있어 모두다 선경(仙境)이다. 세상에서는 ‘파곶[葩串]’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산의 기이한 자취 중의 네 번째가 된다. 절 서쪽의 법화원(法華院)은 불타버려 마른 빈 자리에 우뚝하게 있는데, 바로 신라의 신승(神僧) 검단선사(黔丹禪師)와 최고운(崔孤雲)이 법화경(法華經)을 강론했던 자리이다. 그러므로 검단산(黔丹山)이 그 서쪽에 있고 고운대(孤雲臺)는 그 아래에 있다. 또 청화산(靑華山)이 있어 동쪽에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속리산(俗離山)은 남쪽에서 그 위용(威容)을 자랑하고 있다. 낙영산(落影)은 두 명산(名山)의 사이에 있으면서 자정(慈淨), 함허(涵虛), 검단(黔丹), 고운(孤雲) 등 네 사람이 일어나 천지간에 고명(高名)을 얻었다. 이것이 산의 훌륭한 경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기이한 자취의 다섯 번째이다.
정유년과 임진년의 난리를 겪었을 때에는 왜구(倭寇)가 갑자기 들이닥쳤으나 사찰의 신령스럽고 기이한 기운을 두려워하여 감히 들어오지는 못하고 밖에서 불을 놓았다. 그러나 오직 동서(東西)의 회랑(回廊)은 다 타서 재가 되었지만 불전(佛殿)과 스님의 거처는 바람이 바뀌고 불길이 소멸되어서 모두 재앙을 면하였다. 적들이 화를 내며 활을 어지러이 쏜 뒤에 떠나가니, 그 화살촉의 흔적이 절의 기둥에 완연히 남아 있는 것이 옛날과 같았다. 이것이 또한 절의 신령스럽고 기이한 자취 중의 여섯 번째가 된다. 그러고 보면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모두 자정과 함허가 일찍이 거쳐 갔던 곳이지 난리 뒤의 사람들이 새로이 지은 곳은 아닌 것이다. 지금 큰 스님 태행(太行)이 부처님을 모실 계획으로 여러 시주(施主)들에게 알리니, 즉각 착하고 신실한 군자(君子) 20여 명과 흥비(興比) 세 사람 등이 같이 부처님께 큰 소원을 빌며 함께 논을 거두어 부처님께 시주하여 영원히 부처님을 모시는 재원(財源)으로 삼았으니, 어찌 적은 보탬이겠는가.
무릇 모든 비명 새기는 일은 이미 그 일을 마치게 되면 그에 대한 사적을 새기거나 공덕(功德)을 칭송함으로써 세상에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도모하는데, 이를 일러 참람되게 비석이라고 하여 마침내 그로써 전해지는 것이다. 어느 날 저녁에 대중들이 모여 체심도인(體心道人)에게 넌지시 말하기를, “아! 이 사찰은 자정(慈淨)과 함허(涵虛), 두 선사(禪師)의 도량이지만, 일찍이 기록해놓은 글이 없습니다. 옛날의 기이한 자취에 대해서는 비록 사람들이 입으로 외우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찌 문장가의 손을 빌어 글을 지어서 쇠나 돌에 새김으로써 견고하게 하기를 도모하는 것만 같겠습니까. 비석을 세워서 옛 일을 빛나게 한 것은 모두 지금 여러 시주(施主)들의 공입니다.” 하였다. 이에 조계종(曹溪宗) 장로(長老) 조영(祖瑛) 대덕(大德)이 살펴보고 기뻐하여, 정묘년에 간단한 편지를 써서 하인을 통해 영남(嶺南)으로 보내서 나에게 뇌문(誄文)을 청하였다. 내가 조영과는 함께 가르침을 받은 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소년시절의 교분도 깊었으므로 나의 졸렬함을 이유로 그가 소망하는 것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해 겨울 통정대부(通政大夫) 응민(應敏) 스님을 보내서 글을 재촉하였으므로, 마침내 마지못하여 보내온 글을 정리하여 억지로 시를 지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불교가 동쪽으로 전래된 것은
주(周) 나라와 진(秦) 나라 때의 일이고,
한(漢) 나라에 이르자 매우 흥성하여
해인(海印)이 온전히 밝혀졌다.
집안에서 기원하여
동방(東方)에 두루 전파되었다.
이에 자정선사(慈淨禪師) 계셔서
불법(佛法)을 친히 익히시어
풍파(風波) 없이 도(道)를 물었도다.
저 신라왕(新羅王)이
어미 새가 그 새끼를 기르듯이 따라
선사 위해 도량을 창건(創建)하였다네.
함허가 옛 모습을 상고(詳考)하여
전(殿)과 당(堂)을 짓고,
세조대왕(世祖大王)이 직접 행차하시니
산은 더욱 빛이 났네.
푸르고 푸른 낙영산(落影山)은
당(唐) 나라 낙양(落陽)에 그림자 드리우고
금탑(金塔)과 부도(浮屠)를 빛내며 감싸고 있네.
밝은 계곡과 빼어난 산,
맑은 근원을 가진 골짜기 안에
천년을 전해 내려온 선방(禪房)을 품고 있어,
이 산 과 이 절에
여섯 가지의 신기한 사적이 전해 내려온다네.
여러 시주(施主)들이
신심(信心)으로 농장(農莊)을 시주하고,
부처님께 공양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복(福)을 구함에 그 예절을 아는구나.
그 행적이 비석에 적혀 있어
영원히 멀리 후대(後代)에 전해질 것이니,
떠가는 구름도 돌을 보호해주기를
탁보(卓甫)는 바라노라.
강희(康熙) 27년(숙종 14, 1688년) 3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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