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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곡면 옥전리 무첨재(梅谷面 玉田里 無添齋)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영동군(永同郡)

매곡면 옥전리 무첨재(梅谷面 玉田里 無添齋)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3. 6. 8. 22:25

 

날이 조금은 덥다

영동의 매곡면을 둘러보기로 하고 떠난 길이다

구석구석의 모든것들을 보려는 나의 욕심이 갈길을 더디게 만든다'

노천리의 매한손효자문을 둘러보고 무첨재가 있는 옥전리로 접어든다.

 

무첨재는 도유형문화재 172호로 93년 6월 4일에 지정되여 관리되고있다.

 

 

감자꽃이 하얗게 수를 놓은 감자밭을 앞으로 하고 무첨재는 자리하고 있었다.

옥전리는 본래 황간현 동오곡면 지역으로 1909년 황간군 오곡면에 속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옥사(옥사:구사).남양(남양).평전(평전).안녕을 병합하여 ‘옥사’와 ‘평전’의 이름을 따서 옥전리라고 하고 영동군 매곡면에 편입시켰다.

행정리로 옥전리(옥전:玉沙:龜沙, 남양:내매이)와 평전리(평전:평밭, 안녕:안이)가 있다.

 

 

 

무첨재는 특이하게도 자연석을 이용하여 돌담을 둘렀다.

무첨재는 중종 14년(1519)에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하여 고향에 돌아온 안요(安燿:1481∼1546) 선생이 지어서 학문을 가르치던 곳으로

 "네가 난 바에 욕됨이 없게 하라"는 뜻으로 무첨이라 하였다.

중종 17년(1522)에 처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 9년(1872)에 일부가 불탄 것을 중수하였다.

그 후 1911년과 1948년, 1995년에 중수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안남박(安南朴)이란, 순흥안씨, 고성남씨, 충주박씨를 가르키는 말로 학문이 뛰어난 인물을 기준으로 하여 생겨난 말이라 한다.

제일 먼저 순흥안씨가 매곡면 옥전리 일대에 낙향하여 거주하였는데 곧이어 고성남씨가 상촌면 임안리 일대에 거주하고, 순흥안씨가 거주한 이후 80년이후에 충주박씨가 매곡면 내동, 내오곡 일대에 거주하였다.

특히 안요(安燿)의 후손인 16세 옥담(玉潭) 안국민(安國民)은 당대(當代)의 학자로 이름을 크게 떨쳤다.

그의 수학자(受學者)들중 도덕문장이 뛰어난 이들이 많았는데, 특히 충주박씨(忠州朴氏) 참봉공 사삼(事三)과 그 아들 참봉공 유동(惟棟) 일석의 문장(文章)이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안남박(安南朴)이란 말이다. 

들어가는 입구에 모현문이라는 이쁜 이름이 걸려있다

무첨재는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정교한 기법의 건물이다.

 

안요 선생의 본관은 순흥이다. 이조판서(증직) 안우하(安友夏)와, 세종의 왕자 밀성군(密城君)의 딸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여러 차례의 사화의 어려움을 겪고서 영동군 매곡으로 돌아와 무첨재를 짓고 후학을 위해 강학에 힘썼다.

 

 

 

 

영동 황간파(黃澗派)의 낙향조 13세 안요(安燿)는 정6품인 오위부 계사과(五衛部 階司果)이다.

안요는 순흥인으로 문숙공 안숭선(安崇善)의 증손으로 11세 참판공 안의(安誼)의 손이며 판서공 안우하(安友夏)의 둘째 아들이다.

판서공의 7자제중 둘째인 안요(安燿), 넷째 안훈(安燻)은 각각 영동과 괴산으로 이거하였다.

사과공 안요(安燿)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난 해인1519년 영동군 황간으로 이주하여

현재 매곡면 옥전리, 수원리일대에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