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양산면 누교리 영국사 원각국사비(陽山面 樓橋里 寧國寺 圓覺國師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영동군(永同郡)

양산면 누교리 영국사 원각국사비(陽山面 樓橋里 寧國寺 圓覺國師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3. 6. 13. 19:47

 

이 비석은 고려 의종 7년(1154)에 선사(禪師:선종의 법리에 통달한 스님)가 되었고,

명종 1년(1171) 9월 12일 왕사(王師:임금의 스승)가 된 원각국사비 이다 원각국사는 대선사 교웅의 밑에 들어가 아홉 살에 중이 되었다.

선사의 유골은 영국사에 모셔졌으며, 고려 명종 10년(1180) 한문준이 비문을 지어 원각국사비를 건립하였다고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상권에 그 전문이 소개되고 있다. 비몸돌(碑身)은 점판암 1장으로 되었으며, 비문은 총알을 맞아 손상된 곳이 많아

그 내용을 전부 알 수는 없다.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과 비머리( 首:비의 갓으로 용모양을 새긴 것)에 있는 네 마리 용은 매우 특이하며,

각 부분의 조각은 그 제작 연대가 뚜렷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원각국사비문〕

▨▨▨▨台宗贈諡圓覺國師碑銘 幷序」
      朝散大夫同知樞密院事判司宰事知 制誥兼太▨」
▨如來所說三乘十六分敎八萬法門悉備於乾竺而海東之國猶聾法雷之音然微言所被無有遠迩▨▨▨▨▨▨▨▨▨▨▨▨▨▨▨▨▨▨▨▨▨」
尙焉而其風大振於卞馬之閒則慧日之所炤法雨之所霑混爲一區 我太祖艱難之際頗賴陰助成萬世▨▨▨▨▨▨▨▨▨▨▨▨▨▨▨▨▨▨▨」
東漸宗門未立及 文王第四子大覺國師於 宣王在位第三年庚午法求▨入宋行錢塘而問道登佛隴而望▨▨▨▨▨▨▨▨▨▨▨▨▨▨▨▨▨」
議天台者以大覺爲始祖然人能弘道非道弘人故大道之行必待其人今夫天台秘藏最滕法門也必有名世者▨▨▨▨▨▨▨▨▨▨▨▨▨▨▨▨▨」
不泯然後可資福利以保邦國焉是以大覺旣沒後七年而天以國師誕靈於世將以護正法也何以知其然哉師爲▨▨▨▨▨▨▨▨▨▨▨▨▨▨▨▨」
手不停輟以求佛道則非天以國師護正法而然耶且考諸經文如來室者大慈悲心是如來衣者柔和忍辱心是如來▨▨▨▨▨▨▨▨▨▨▨▨▨▨▨」
不懈怠心闡揚佛敎使流通於萬世遂能轉大法輸度無量衆者唯我國師歟師諱德素字慧約少名子美俗姓田氏潭▨▨▨▨▨▨▨▨▨▨▨▨▨▨▨」
州守時丁亥三月六日母南原郡夫人梁氏感夢自京洛至州界軒盖滿路而師是夕生焉父母知其貴以子美稱之▨▨▨▨▨▨▨▨▨▨▨▨▨▨▨▨」
僧曰國淸寺淨源也師欣然與語如舊相識遂隨而往投大禪師敎雄門下九歲剃髮雄公常言興吾宗者必此沙彌▨▨▨▨▨▨▨▨▨▨▨▨▨▨▨」
則必與師遊戱一日共觀佛殿偶入大藏堂開凾撥卷授師師輙隨卷能通仁廟歎曰此僧異日必爲大法師矣戊申▨▨▨▨▨▨▨▨▨▨▨▨▨▨」
開場大選者前選落子美也翌日果中則師非只一世佛種少時名亦夙世名也 仁廟踐祚十一年壬子幸國淸寺▨▨▨▨▨▨▨▨▨▨▨▨▨▨▨▨」

師癸亥春師謝遺門從遊歷山水至蔚州靈鷲山以捿止焉則彼智者旋鄕而▨地無以加此而四方學者請益日煩又聞▨▨▨▨▨▨▨▨▨▨▨▨▨▨」
會路涉蒼海黑風忽起怒濤如山舟人恐懼莫知所爲師恬然誦普門品瞬息間風浪自滅命棹而濟在庚午歲手寫金經▨▨▨▨▨▨▨▨▨▨▨▨▨▨」
政之八年癸酉以師爲禪師乙亥春賜磨衲衣甲申夏久旱 毅廟設說經會于文明宮 詔師爲主展講之初時雨沛然田野▨▨▨▨▨▨▨▨▨▨▨▨」
隨駕所以護行在也卽輦下 命師擧 宗碩學可授批職者其所薦皆副公望還駕駐平州以師爲大禪師泊 皇上臨朝二年辛卯▨▨▨▨▨▨▨▨▨」
佛法僧於是 思得碩德以爲師範而 聖意不敢自專乃擇禪敎耆舊宿德各封其名置佛像前 俯伏祈禱而後取一封又詣 祖聖眞▨▨▨▨▨▨▨」
上於是遺戚弟▨世僧統石僕射朴景瑞等傳 宣已後繼日累請師皆讓以不稱遣使其三請師知 上意懃懇不得已而受 命焉甲寅遣▨▨▨▨上▨▨」
等備禮封崇十一月甲戌大會道俗群臣陳師禮此日設百座會至行香時 上先就師之便恭致禮而後 上殿後於壽昌宮和平殿設金經會請師▨▨」
▨▨▨則或▨步輦行幸承顔問訊其敬重如此甲午十月己丑▨天壽寺大延▨▨十一月癸已遘微疾 上親臨病席 手供藥餌又 命右僕射朴景瑞」
▨▨▨▨▨▨▨▨▨師手拂去之還坐跏趺 上曰此師之平昔所操心也是日 命侍奉禪師承智侍出毉王寺閒一日向西端坐合掌而化 上聞之」
▨▨▨▨▨▨▨▨▨▨▨▨岳山西麓師之遘疾內人郭永堅夢迎▨門▨有▨▨聲問人答厶此如來涅槃時也望見僧從衣白成鶴林圍繞登空而西▨」
▨▨▨▨▨▨▨▨▨▨▨▨▨▨電翌日師果不預十一月庚寅 命禪師承智奉骸骨▨▨▨下安于陽山管內智勒山寧國寺乙未四月 遺大史▨▨」
▨▨▨▨▨▨▨▨▨▨▨▨▨▨▨▨▨瑩原時甞言瑩原者禪家古刹▨事紛擾不▨▨▨▨▨▨▨勒山高水淸眞修道處遂上請使    ▨▨▨」
▨▨▨▨▨▨▨▨▨▨▨▨▨▨▨▨▨▨▨▨▨▨▨無病所着衣裳有▨▨▨▨▨▨▨▨▨▨▨▨▨▨▨▨▨▨▨▨讀佛典餘事不掛▨▨▨▨」
(陰記)
圓覺國師碑陰門徒職名」
禪師承智三重大師再思曇曜顗胤神秀▨▨重」
文便禀龍曇機師安中益道說思玄道堅闡觀▨」
默心玄承便繼安▨頤處綠釋猊入選學徒▨▨」

希文効安定訓惟文南胤妙南惟章領純心▨▨」
珠惟安敦守觀餘心銳仁順玄中文光義仁▨▨」
智海信淵義圓惠胤靈淵釋蘭懷璉得義宗順▨」
翊理融中安戒璋定璋知奧曇實令端智粹冲玄」
戒敦戒嚴戒暉理敦文儒須餘大賢敦俊希觀法」
瑜威胤淵遠其▨戎全光秀淵寶等百餘人皆▨」
師義詮惠琳觀祐存覺存正珪禪法光道南▨▨」
成大元信宗直神孝等二百人佛恩寺重▨▨▨」
淸寺重大師惟正等三百人天壽寺▨▨▨▨▨」
下使令已上凡一千二百餘人▨▨▨▨▨▨▨」
        右▨▨▨▨▨▨▨▨▨▨」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下篇 (1984)]


(결락) 태종(台宗) 증시원각국사비명(贈諡圓覺國師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조산대부(朝散大夫)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판사재사(判司宰事) 지제고(知制誥) 겸(兼) 태▨(太▨) (탈락)
대저 부처님께서 설법(說法)하신 삼승(三乘) 십이분교(十二分敎)인 팔만법문(八萬法門)이 모두 건축(乾竺)에서 갖추어졌으나, 해외의 나라에는 아직 법음(法音)이 전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의 미묘한 말씀의 전파는 원근(遠近)을 막론하고 (결락) 상언(尙焉). 그러나 그 교풍(敎風)이 변마(卞馬)의 지방에크게 떨쳐, 혜일(慧日)의 비춤과 법우(法雨)의 적신 바로 혼연히 정신적으로 한 구역이 되었다. 우리 태조(太祖) 임금께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자못 음(陰)으로 양(陽)으로 스님의 도움을 힘입어 만세(萬世)의 성군이 되었다. (결락) 불교가 점점 동쪽으로 전래하였고 , 따라서 천태종(天台宗)도 이미 전해졌지만, 아직 종문(宗門)이 성립되지 못하였다.
문왕(文王)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가 선왕(宣王)이 즉위하신 3년 경오(庚午)에 불법(佛法)을 배우고자 송(宋)나라에 들어가 전당(錢塘) 지방으로 다니면서 도(道)를 묻고, 불롱(佛隴) 천태산(天台山) 지자대사의 탑전에 올라가 영정(影幀)을 바라보고 우리나라에 천태종(天台宗)을 세워 홍천하기를 간절히 발원하였다. (결락) 천태종을 논의하는 자들이 대각국사로써 시조(始祖)를 삼았으나, 사람이 능히 도(道)를 넓히는 것이지 도(道)가 사람을 넓게 하는 것이 아니므로, 대도(大道)가 유행함에는 반드시 그러한 사람을 만나야만 되는 것이다. 천태(天台)의 비장(秘藏)한 교리는 최승(最勝)의 법문(法門)이다. 반드시 천태종(天台宗)이란 이름이 세상에 남아 있게 됨은 (결락) 민멸(泯滅)하지 아니한 연후(然後)에 가히 복리(福利)를 자뢰(資賴)하여 나라를 보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각국사가 입적(入寂)한지 이미 7년이 지났으나, 하늘이 국사로써 세상에 강탄(降誕)케 하여 장차 정법(正法)을 옹호토록 하였다. 어찌 그런 줄 아는가! 스님께서는 (결락) 때문이다. (결락) 손에는 항상 책을 놓지 않고 , 불도(佛道)를 구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국사로 하여금 정법(正法)을 보호하도록 그렇게 함이 아니겠는가!
또 모든 경문(經文)을 상고해 보건대, 여래(如來)의 실(室)이란 대자비심(大慈悲心)이 그것이며, 여래(如來)의 옷이란 유화(柔和)한 인욕심(忍辱心)이 그것이며, 여래(如來)의 좌(座)란 법실좌(法室座)가 바로 그것이라고 하였다. (결락) 이러한 경지에 안주(安住)한 연후에 게으르지 않는 정진심(精進心)으로 불교를 천양하여 만세(萬世)토록 유통케 한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능히 대법륜(大法輪)을 전하여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는 이는 오직 우리 원각국사뿐이라 하겠다.
스님의 휘는 덕소(德素)요, 자는 혜약(慧約)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자미(子美)요, 속성은 전씨(田氏)이다. 담(潭) (결락) 아버지가 (결락) 주수(州守)로 있을 때인 정해년(丁亥年) 3월 6일 어머니 남원군부인(南原郡夫人) 양씨(梁氏)가 어느날 밤 경락(京洛)으로부터 주계(州界)에 이르기까지 헌개(軒盖)가 길에 가득히 이어져 있는 꿈을 꾸었는데, 스님은 그 날 밤에 태어났다. 부모가 그 귀(貴)함을 알고 자미(子美)라고 이름을 지었다.
(결락) 어떤 스님이 이르기를 “저는 국청사(國淸寺) 정원(淨源)입니다”라 하므로, 스님은 기꺼이 그와 더불어 대화하니 마치 오래전부터 잘 아는 구면과 같았다. 드디어 따라가서 교웅대선사(敎雄大禪師)의 문하에 던져 9살 때 삭발하고 득도하였다. 웅공(雄公)이 항상 이르기를 “나의 종지(宗旨)를 중흥할 자는 반드시 이 사미(沙彌)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결락) 즉(則). 반드시 스님과 함께 유희하였는데, 어느날 함께 불전(佛殿)을 참관하다가 우연히 대장당(大藏堂)에 들어가 경함을 열고 책을 빼내어 스님에게 주므로 스님은 문득 그 책을 받아 곧 능통(能通)하였다. 인조 임금께서 찬탄하여 이르시기를, “이 스님이 훗날 반드시 큰 법사(法師)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신년(戊申年) (결락) 법계 고시장을 열고 대선(大選) 시험을 보기 전에 이미 자미(子美)가 당선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다음날 과연 합격되었으니, 스님은 단지 일세(一世) 동안에만 불교에 선근을 심었을 뿐 아니라, 소시(少時)의 이름이 또한 숙세(夙世)의 이름이었다. 인종(仁宗)이 천조(踐祚)한지 11년째인 임자(壬子)에 인종 임금이 국청사(國淸寺)에 행행(幸行)하여 (결락) 사(師). 계해년(癸亥年) 봄에 스님께서 문도들을 흩어 보내고 제방(諸方)으로 유력(遊歷)하면서 심사방도(尋師訪道)하다가, 울주(蔚州) 영취산(靈鷲山)에 이르러 주석(住錫)하였다. 지자(智者)들이 여러 곳에서 모여들어 이보다 더할 것이 없었고, 사방의 학자(學者)들이 법을 청함이 날로 많아졌다.
또 들으니 (결락) 돌아오는 길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중,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성난 파도가 산과 같이 높이 솟았다. 배에 탄 사람들이 어찌 할 바를 몰라 두려움에 싸여 우왕좌왕하였다. 이때 스님께서 태연히 보문품(普門品)을 독송하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풍랑이 저절로 가라앉아 무사히 건너갔다. 경오세(庚午歲)에 손수 금박으로 사경하였다. (결락) 즉위(卽位)하여 국정에 임한지 8년째인 계유(癸酉)에 스님을 선사(禪師)로 진가(進加)하였으며, 을해년(乙亥年) 봄에는 마납법의(磨衲法衣)를 하사하였다. 갑신년(甲申年) 여름 날씨가 오랫동안 가물었므로 의종이 문명궁(文明宮)에서 설경법회(說經法會)를 열고 스님을 초빙하여 강주(講主)로 추대하였다. 강경(講經)을 시작하자마자 큰 비가 쏟아져 전야(田野)와 식수가 완전히 해갈하여 그 해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 (결락) 임금을 수행하였는데, 임시거처인 행재소(行在所)에 있는 임금을 돕기 위해서였다. 곧 스님에게 명하여 거종(擧宗)의 석학(碩學)들에게 가히 비직(批職)을 줄 만한 스님을 추천토록 하였으니, 그가 추천한 대상은 모두 공망(公望)에 부응하였다. 의종 임금이 돌아오는 도중 평주(平州) 에 머물러 있을 때, 스님께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첨가(添加)하였다. 명종(明宗) 2년 신묘(辛卯) 에 이르러 (결락) 불(佛)·법(法)·승(僧)에게 (결락)
이와 때를 같이하여 국내의 모든 고승대덕 중에 덕망이 높은 스님을 선발하여 사범(師範)을 삼고자 하였으나, 왕의 뜻대로 감히 스스로 결정할 수 없어서 선(禪)·교종(敎宗) 중 많은 耆舊(구참)와 宿德(大德)들을 택하여 불전(佛前)에 각기 그 이름을 봉(封)하여 두고 기도한 다음, 일봉(一封)씩 취하여 추첨으로 선발하였다. 또 임금의 진영(眞影) 앞에 나아가서(결락) 상(上)이 이에 척제(戚弟)(결락) 세승통(世僧統)과 우복사(右僕射)박경서(朴景瑞) 등을 보내어 왕의 뜻을 전달한 후 계속 여러 번 청하였지만, 스님도 모두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사신을 세 번이나 보내어 굳게 請하므로스님께서 임금의 뜻이 간절한 줄 알고, 부득이하여 왕명을 받아들였다. 갑인년(甲寅年)에 견(遣) (결락) 상(上) (결락) 등이 예를 갖추어 왕사(王師)로 책봉하였다. 11월 갑술에 도속(道俗)과 군신(群臣)이 크게 모여 스님께 예배를 올리고, 이어 이 날에 백고좌회(百高座會)를 베풀어 행향(行香)하는 때에 이르러, 임금께서 먼저 스님 앞에 나아가 공손히 예배한 후 상전(上殿)하였다. 그 후 수창궁(壽昌宮) 화평전(和平殿)에서 금광명법회(金光明法會)를 베풀고, 스님을 청하여 회주(會主)로 추대하였다. (결락) 즉(則) 혹(或) (결락) 임금께서 보연(步輦)으로 행행(行幸)하시어 스님의 얼굴을 뵙고 문안하였으니, 그 공경함이 이와 같았다. 갑오년(甲午年) 10월 기축 (결락) 천수사(天壽寺) 대연(大延) (결락)
11월 계사(癸巳)에 미질(微疾)이 나타났으므로 임금께서 친히 병석(病席)에 왕림하여 손수 약물을 제공하였다. 또 우복사(右僕射) 박경서(朴景瑞)를 보내 약탕을 올렸으나, (결락) 스님께서 손을 들어 뿌리치고, 선좌(禪座)에 돌아가 가부(跏趺)를 틀고 앉았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이것이 스님이 평소에 가지고 있는 마음자세”라고 찬탄하였다. 이 날 시봉(侍奉)인 승지선사(承智禪師)에 명(命)하여 모시고 의왕시(毉王寺)로 옮기게 하였는데, 하루를 지난 후, 서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합장(合掌)하고 엄연히 입적(入寂)하였다.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결락) 송악산(松岳山) 서쪽 기슭에서 다비하였다.
스님께서 병에 걸렸으므로 내인(內人) 곽영견(郭永堅)이 꿈에 (결락) 문(門) (결락) 유(有) (결락) 성문인(聲問人)이 대답하되, “이것이 여래(如來)께서 열반하신 때”라고 하였다. 승도(僧徒)를 바라보니, 옷 빛이 백색(白色)으로 변하여 학림(鶴林)을 이루었다.이 백색 광명(光明)이 주변을 돌다가 허공으로 올라 서쪽으로 (결락) 전(電). 다음날 과연 발병(發病)하였다. 11월 경인(庚寅)에 승지선사(承智禪師)에 명(命)하여 해골을 받들어 (결락) 하(下). 양산(陽山) 관내(管內) 지륵산(智勒山) 영국사(寧國寺)에 안장하였다. 을미년(乙未年)4월 태사(太史)를 보내어 (결락) 형원사(瑩原寺)에 있을 때, 일찍이 이르기를 형원(瑩原)이란 선가(禪家)의 고찰(古刹). (결락) 사(事)가 분요(紛擾)하여 부(不) (결락) 지륵(智勒)은 산고수청(山高水淸)하여 참으로 수도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드디어 상청(上請)하여 선사(禪師) 승지(承智)로 하여금 (결락) 무병(無病)하며, 입은 바 의상(衣裳)에 유(有) (결락) 불전(佛典)을 읽는 일을 제외하고는 다른 일은 전혀 흉중(胸中)에 걸어두지 아니하였다.
(음기(陰記))
원각국사(圓覺國師) 비음(碑陰) 문도직명(門徒職名)
선사(禪師)      승지(承智)
삼중대사(三重大師)  재사(再思) 담요(曇曜) 기윤(覬胤) 신수(神秀) ▨▨
중대사(重大師)    문편(文便) 품룡(禀龍) 담기(曇機) 사안(師安) 중익(中益) 도설(道說)
           사현(思玄) 도견(道堅) 천관(闡觀) ▨묵(▨黙) 심현(心玄) 승편(承便)
           계안(繼安) ▨이(▨頤) 처연(處緣) 석예(釋猊)
입선학도(入選學徒)  ▨▨ 희문(希文) 효안(効安) 안훈(安訓) 유문(惟文) 남윤(南胤) 묘남(妙南)
           유장(惟章) 영순(領純) 심▨(心▨) ▨주(▨珠) 유안(惟安) 돈수(敦守) 관여(觀餘)
           심예(心銳) 인순(仁順) 현중(玄中) 문광(文光) 의인(義仁) ▨▨ 지해(智海)
           신연(信淵) 의원(義圓) 혜윤(惠胤) 영연(靈淵) 석란(釋蘭) 회련(懷璉)
           득의(得義) 종순(宗順) ▨익(▨翊) 이융(理融) 중안(中安) 계장(戒璋) 정장(定璋)
지오(知奧) 담실(曇實) 영단(令端) 지수(智粹) 충현(冲玄) 계돈(戒敦)
           계엄(戒嚴) 계휘(戒暉) 이돈(理敦) 문유(文儒) 수여(須餘) 대현(大賢)
           돈준(敦俊) 회관(希觀) 법유(法瑜) 위윤(威胤) 연원(淵遠) 기▨(其▨)
           융전(戎全) 광수(光秀) 연보(淵寶) 등(等) 백여인(百餘人)
은(銀) 개▨사(皆▨師) 의전(義詮) 혜림(惠琳) 관우(觀祐) 존각(存覺) 존정(存正) 규선(珪禪)
           법광(法光) 도남(道南) ▨▨ 성대(成大) 원신(元信) 종직(宗直) 신효(神孝)
           등(等) 이백인(二百人)
불은사(佛恩寺)  중대사(重大師) ▨▨
국청사(國淸寺)    중대사(重大師) 유정(惟正) 등(等) 삼백인(三百人)
천수사(天壽寺) (결락) 하사령(下使令) 이상(已上) 범일천이백여인(凡一千二百餘人) (결락)
         우(右) (결락)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3】(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