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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곡면 노천리 흥학당(梅谷面 老川里 興學堂)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영동군(永同郡)

매곡면 노천리 흥학당(梅谷面 老川里 興學堂)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3. 6. 12. 13:12

 

이 곳은 충주 박씨 종중에서 후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서당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선영 아래에 지었기 때문에 자손들의 작업장으로, 묘소에 향사할 때 재실의 역할로도 사용되었다.

중종 15년(1520)에 박씨 가문의 목사공 등 3형제가 당시 황간현감 박영(朴英:1471∼1540) 선생에게 배울 때 선생의 지시에 의해 처음 지었다.

숙종 35년(1709)과, 영조 11년(1735), 고종 6년(1869)에 각각 중수하였다. 정면 4칸, 측면 2칸 집이다.

중앙의 2칸은 우물마루(짧은 널을 세로로 놓고 긴 널을 가로로 놓아 井자 모양으로 짠 마루)를 한 넓은 대청의 공간이며,

양 끝방은 각각 온돌방으로 꾸미고 있다. 『흥학당기(興學堂記)』와 중수기(重修記) 등이 전하고 있다.

 

 

 

흥학당 뒤로 재실인 세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흥학당 옆에는 봉유재가 자리하고 있다. 흥학당과 봉유재 모두 노천리 마을 끝에 자리하고 있다.

 

 

 

 

 

 

 

박영[1471-1540]은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松堂). 시호는 문목(文穆) 할아버지는 안동대도호부사 철손(哲孫)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수종(壽宗)이며, 어머니는 양녕대군(讓寧大君) 지(祗)의 딸이다. 선산(善山)에서 대대로 살았다

 

박영은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나 담 너머 물건을 쏘아도 반드시 맞히므로 아버지가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영(英)이라 하였다.

1487년(성종 18) 이세필(李世弼) 막하(幕下)에 있을 때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91년 원수(元帥) 이극균(李克均)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였다. 이듬해 돌아와서 겸사복(兼司僕)이 되고, 9월에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항상 자신이 무인으로서 유식한 군자가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이에 1494년 성종이 별세하자 가솔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서 낙동강 변에 집을 짓고 송당(松堂)이라는 편액을 걸고, 정붕(鄭鵬)·박경(朴耕) 등을 사우(師友)로 삼아 ≪대학≫과 경전을 배워 격물치지(格物致知)에 힘써 깨닫는 이치가 많았다.

1509년(중종 4) 선전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이듬해삼포(三浦)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창원(昌原)에 부임하였다. 1514년 황간현감(黃澗縣監)이 되어 훌륭한 치적을 남겼고, 1516년 강계부사(江界府使), 1518년 의주목사(義州牧使)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역임하였다.

 

 

[박영의 글씨]

 

1519년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그 해 5월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모면하였다. 이듬해 김해부사(金海府使)가 되었다가 곧 사직했는데, 김억제(金億濟)의 모함으로 유인숙(柳仁淑)과 함께 혹형을 받았으나 무고(誣告)임을 적극 주장해 풀려날 수 있었다. 뒤에 영남좌절도사(嶺南左節度使)로 임명되었으나 곧 죽었다.

의술에도 능하였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황간의 송계서원(松溪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당집≫·≪경험방 經驗方≫·≪활인신방 活人新方≫·≪백록동규해 白鹿洞規解≫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