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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낭성면 관정리 신백우선생사적비( 申伯雨先生事積碑) 본문
1887 충북 청원~1962 청원.
독립운동가·노동운동가.
1920년대 사상단체와 노동자·농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국내에 사회주의사상을 소개했다. 본관은 고령. 호는 경부(耕夫). 어려서 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신채호(申采浩)와 같이 공부하기도 했다. 1905년 상경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했으며, 1908년(융희 2) 광성측량학교를 5개월 속성으로 마친 후 청주 탑동측량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1909년 다시 상경하여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속성과(일어)에 입학했으며, 신채호의 권유로 신민회에 가입하고 신민회 소속 청년들로 구성된 대동청년단에 참여했다. 1910년에는 서북농림강습소·부기강습소·음악강습소와 보성전문 법과 야간부에 입학했으며, 태극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11년 만주로 건너가서 서세충(徐世忠)·맹보순(孟輔淳)·이광(李光)·이동녕(李東寧) 등과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운동의 연락기관으로서 서세충과 함께 안동현(安東縣)에서 성덕태상점을 설립했으며 대동청년당의 재건에도 노력했다. 1918년 귀국하여 1919년에는 한성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했다. 같은 해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채호·한위건(韓偉健) 등과 신문 〈신대한〉을 발간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노선을 비판하고 무장항쟁을 주장했으며, 그해 11월에는 서로군정서의 참모주임이 되었다. 1920년 4월 경성에서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기관지 〈공제〉의 편집주간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사회주의 이론가로 노동·농민단체 및 사상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1922년 1월에는 윤덕병(尹德炳)·김한(金翰)·원우관(元友觀) 등과 무산자동맹회를 조직했으며, 그해 10월에는 윤덕병과 함께 조선노동연맹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노동〉의 편집책임을 맡았다. 1923년 7월 홍명희(洪命熹)·윤덕병·이승복(李昇馥)·원우관 등과 함께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했고, 1924년 4월에 창립된 조선노농총동맹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조선일보 고문 겸 논설위원을 지냈다. 같은 해 10월 조선공산당 창당준비기관인 코르뷰로 국내부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1925년 보석으로 풀려나 귀향했다.
이후 사회주의 운동과 관계를 끊고 청원군 낭성면 관정리에서 생활했다. 8·15해방 이후 신탁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의 중앙위원과 조직부장이 되었으며 1946년 대한독립촉성회에 참여했다. 1947년에는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발기·조직하여 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한편 대종교에서 많은 활동을 하여 1955년에는 정교가(正敎加)·대형호(大兄號)를 거쳐 원로원 참의(參議)가 되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국권회복운동과 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1907년 4월에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서울과 충청북도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에는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1909년에는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성 일대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데 노력하였고, 귀국 후 3·1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다시 만주로 망명한 그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부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에 귀국하였다.
1920년 4월에는 동지들과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를 조직하여 교육부위원을 담당했으며 기관지 『공제(共濟)』의 주간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에는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를 발기하여 조직하고 기관지『노동(勞動)』의 편집 책임자로 활동하였다.1923년 7월에는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 후에 火曜會로 개칭)를 조직하였으며,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을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가 코민테른에 대표파견 사건으로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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