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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면 환희리 수천암((玉山面 歡喜里 水泉庵) 본문

통합청주시/흥덕구(興德區)

옥산면 환희리 수천암((玉山面 歡喜里 水泉庵)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5. 29. 09:54

 

 

환희리 밀양박씨 사당인 공효묘를 지나 길을 재촉하니 멀리 박훈신도비가 보인다.초행길이 아니다 보니 박훈 신도비를 지나 잠시 박훈선생 묘소를 들려 산길을 따라 내려가면 우측으로는 수천암 들어가는 길이 안내석과 함께 기다리고 있다.도로를 따라 가도 되지만 박훈묘소밑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길을 걸어 내려가도 된다

 

 

 

충청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여 관리되고 있는 수천암 들어가는 입구이다.들어가는 입구부터 잡초등을 제거하여 놓아 깨끗한 이미지를 받았다.

 

 

 

선정조사 승탑이 있는 언덕에서 찍은 수천암의 모습이다. 선정조사 승탑은 박훈의 동생인 박혜의 무덤앞에 자리하고 있다

밀양박씨 문강공인 박훈이 기묘사화의 난을 피해 이 곳에 정착하여 종중의 선산으로 이용하였을때 박훈,박혜형제와 선정조사는 교분이 있었던 듯 하다. 그 후 선정조사가 주지로 있던 수천암을 밀양박씨문도공파에게 재실로 사용할수 있도록 한 듯 하다. 이에 문도공파에서는 선정조사의 승탑을 이 곳에 설치하고 부도사례답으로 논다섯마지기를 두어 승탑의 유지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이 건물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본래 조선시대 중기에 禪定祖師가 주재하였던<水泉庵>이라는 사찰이었는데, 中宗 35년(1540)에 절 바로 뒷산 능선에 密陽朴氏 文度公派의 시조인 江叟 朴薰 선생의 묘소가 조성된 이후 재실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건물 처마 밑에는 아직도 <水泉庵>이라 새긴 현판이 걸려 있고, 북서쪽 언덕에는 石鐘形의 禪定祖師 浮屠가 현존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상량문으로 보아 1914년에 중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때 사찰에서 전형적인 재실형태로 큰 변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대청의 종도리 장여에?歲次 甲寅四月二十九日午時立柱上樑 卯坐酉向之基?라는 상량문이 남아 있어 현재의 건물은 1914년에 중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때 사찰에서 전형적인 재실형태로 큰 변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건물은 정면 6.5칸 측면 3칸으로 비교적 큰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평면은 북측에서부터 1칸 반 크기의 부엌, 2칸의 방, 2칸의 대청, 1칸의 방으로 구성되었으며, 방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남측의 온돌방에는 함실아궁이를 두었다. 특히 대청에 접한 북측의 온돌방에는 각각 반 칸씩의 작은 실을 구성하였는데, 祭器의 보관과 神位를 모셨던 공간으로 방과 대청에서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뒤쪽에 봉창을 달았다. 건물의 평면형태가 중부지역의 전형적인 민가 평면으로 구성되었다.

건물구조는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사다리꼴의 방형주초를 놓고 그 위에 방형기둥을 세웠다. 가구형식은 1고주 5량가의 민도리집인데, 후면에 고주를 세우고 전면에는 동자주를 세운 것이 특이하다. 특히 동자주는 대량 위의 장여와 도리에 묻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현재 밀양박씨 문도공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조선시대의 작은 암자를 재실로 용도 변경하여 사용한 특이한 형태로서 1914년에 전면적으로 중수하면서 전형적인 재실 형태로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건축형식이 재실로서의 요소를 잘 갖추고 있어 유교가 중심이 되었던 조선시대 재실 건축 자료이다.

 

 

 

 

 

환희리 도롱골 마을에 있는 밀양 박씨의 재실은 본래 조선시대 선정조사(禪定祖師) 가 주재하였던 ‘수천암(水泉庵)’이라는 절이었는데 후에 재실로 사용하였다고 전해진 다. 현재의 건물은 1914년에 개축된 것으로 전형적인 재실 형태로 개조되었으나 지 금도 ‘수천암’의 편액이 남아 있어 본래 사찰 건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사각추형의 다듬 은 주초석 위에 방형의 기둥을 세운 이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전후 툇집으로서 정면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 2칸, 좌측에 1칸의 온돌방을 구성하였다. 우측의 맨 끝으로는 정면 1칸 반의 부엌을 설치하였으며 좌측 온돌방에는 함실부엌을 두었 다. 특히 대청 그리고 대청에 접한 우측 온돌방에는 각각 반 칸씩의 작은 실을 구성하 여, 제기의 보관과 신위(神位)를 모셨던 공간으로 방과 대청에서 출입할 수 있게 하였 으며 배면으로 봉창을 달았다. 가구는 5량집으로 대들보 위에 종보, 그리고 제형의 판 대공을 설치하여 지붕의 하중을 받도록 되어 있는 홑처마 팔작기와지붕이다. 재실 옆 에는 선정조사의 부도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