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문경읍 상초리 안동부사 김수근 타루비(聞慶邑 上草里 安東府使 金洙根 墮淚碑) 본문

전국방방곡곡/문경(聞慶)

문경읍 상초리 안동부사 김수근 타루비(聞慶邑 上草里 安東府使 金洙根 墮淚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7. 6. 19:58

 

철종 5년인 1855년 김수근이 안동부사로 내려와 선정을 베푼 것을 기려 세운

이 공덕비는 유기목(1802~?)이 짓고 김진형(1801~1865)이 글씨를 써서 세운 것으로 돼 있다.

국내에는 흔치 않은 명칭인 타루비(墮淚碑)란 중국 진(晋)나라 때 양양지방 사람들이 양고의 선정을 잊지 못해

그의 비만 보면 눈물을 흘렸다는데서 유래한 것이다.

공덕비 뒷면에는 남선·임동·재산 등 안동부 소속 38방에서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어 안동부에서 기금을 모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는 김수근이 안동부사로 있은 지 16년이 지난 때이고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던 해이다.

김수근 타루비는 1관문과 2관문 중간사이에 있는 교구정에서 2관문 쪽으로 약 20여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몇 년전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를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교귀정 정비공사를 하면서 주변이 더 깨끗하게 정리가 됐다.

비석은 원래 한 칸의 비각 안에 세워져 있었으나 비각은 없어지고 주춧돌 4개와 주춧돌을 연결하는 장대석만 남아 있다.

비는 비신, 개석, 대좌로 구성돼 있으며 비신은 오석, 개석과 대좌는 화강암이다. 

 

 

 

문경새재에 세워진 송덕비는 대체적으로 문경현감 또는 경상도 관찰사의 것이 대부분인데 상주목사 이익저(李益著)불망비와 안동부사를 지낸 김수근 타루비는 이지역과 무관된 인물들의 비석이다.

김수근 타루비 내용은 김수근이 1839년 안동부사를 하면서 조선 말기 삼정(三政)이 문란 한 것을 바로잡아 백성들이 마을을 떠나 흩어져 살지 않게 했고, 아이와 노인의 이름이 중복된 호구를 정리해 징병제도를 바로잡아 백성이 아들 딸 낳고 잘 살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동의 백성들이 일찍이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우려고 했으나 본부에서는 퇴계 선생의 큰 가르침을 어길 수 없다는 교훈에 따라 비석을 세우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 일백리 밖 새재에 세우는 이유는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이며 김수근 본인도 이 고개를 오가며 경관을 즐겼던 곳이기 때문에 최적의 장소라고 밝히고 있다.

김수근 타루비는 규모면에서 꽤나 큰 비석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비석을 설치하기 위해 주변에 두었던 초석들의 크기 또한  문경에서는 볼 수 없는 큰 규모라 할 수 있다.

여하간 당시 문경과 관련이 없던 인물의 비가 문경새재에 세워진 것만 보아도 당시의 김수근의 위세가 대단 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퇴계 선생은 임종 전 도대체 어떠한 유서를 남기셨길래 퇴계 선생 이후의 안동에 비석이 거의 없는가?

이 유서에는 첫 번째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예를 갖춘 성대한 장례를 피하라는 뜻), 두 번째는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도산에서 물러나 만년을 숨어산 진성 이씨의 묘라는 뜻)라고만 새기고, 뒷면에는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한 바와 행적을 간단하게 쓰도록 당부했다 [경남일보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