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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우의 묘( 朴光佑의 墓) 본문

통합청주시/서원구(西原區)

박광우의 묘( 朴光佑의 墓)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4. 9. 22:19

 

 

 

 

 

 

 

 

 

 

 

 

 [경력]
1519년(중종 14) 생원시에 급제하고, 1525년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 2인(人)으로 합격하였다. 집의(執義), 사간(司諫)을 역임하였으며, 사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활동사항]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상처를 입고 옷을 찢어서 머리를 싸매고 정부외랑(政府外廊)에 앉아서 당시 나이 젊고 글씨에 능한 참판 이찬(李澯)과 참지 김로(金魯)에게 붓을 잡게 하고 자신이 신원소를 불러 쓰게 하였는데, 그 문사(文詞)가 용솟음치듯 함으로써 그의 절의와 문장을 나타내었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여 염우한설(炎雨寒雪)에도 복상(服喪)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525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1536년 재령군수로서 문장에 능하여 원접사(遠接使)를 수행하였고, 1545년 강릉부사(江陵府使)를 거쳐 사간(司諫)이 되었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봉산(鳳山)에 유배되었으나 돈의문(敦義門)을 나서다 51세로 죽었다.

[학문과 사상]
일찍이 조광조와 교분이 있었으며, 뒤에는 이언적(李彦迪)과 같이 화를 당하였으니 그의 사상과 절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묘소]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수대리 산73-1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필재(필齋) 박광우(1495∼1545)의 묘소이다.


중종 14년(1519)에 형 광좌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그 해 기묘사화때에는 상소를 올려 굳은 성품을 나타냈다. 중종 20년(1525)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여지승람』을 펴내었다. 명종 즉위년(1545)에는 사간지제교에 올랐으나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선동역에 유배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광조와 가까운 사이였으며 뒤에 이언적과 같이 화를 당하여 그의 사상과 절의를 짐작할 수 있다. 율곡의 상소로 관직이 회복되어 이조판서의 벼슬이 내려졌고, 송천서원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묘소의 중앙에 봉분이 있는데 바로 앞에 위패비(位牌碑)가 있고, 왼쪽에는 숙종 13년(1687) 송시열이 글을 지어서 세운 묘표(墓表)가 있다. 주위에는 사적비와 문인석 등이 놓여 있는데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