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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우 사당과 신도비( 朴光佑 祠堂 과 神道碑) 본문
[정의]
조선 중기의 학자·관료.
[개설]
조선 중기의 사림(士林)으로 예(禮)의 실천과 기개로 이름났으며, 을사사화(乙巳士禍)로 화를 입어, 사후 서원에 배향되었다.
[가계]
본관은 상주(尙州)로 자는 국이(國耳)이며, 호는 필재(蓽齋), 잠소당(潛昭堂)이다. 청주 출신으로 생원 박린(朴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장유성(張有誠)의 딸이다. 그의 어머니 장씨(張氏)가 서실 3칸을 세우고 네 아들을 교육함에 예제(禮制)를 가지고 교훈이 엄격하여 4형제는 이에 감격, 학행이 크게 성취되니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크게 감탄하여 맹모지교를 다시 보게 되었다고 칭송하였다. 처의 아버지는 박의령(朴義齡)이다.
[경력]
1519년(중종 14) 생원시에 급제하고, 1525년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 2인(人)으로 합격하였다. 집의(執義), 사간(司諫)을 역임하였으며, 사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활동사항]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상처를 입고 옷을 찢어서 머리를 싸매고 정부외랑(政府外廊)에 앉아서 당시 나이 젊고 글씨에 능한 참판 이찬(李澯)과 참지 김로(金魯)에게 붓을 잡게 하고 자신이 신원소를 불러 쓰게 하였는데, 그 문사(文詞)가 용솟음치듯 함으로써 그의 절의와 문장을 나타내었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여 염우한설(炎雨寒雪)에도 복상(服喪)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525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1536년 재령군수로서 문장에 능하여 원접사(遠接使)를 수행하였고, 1545년 강릉부사(江陵府使)를 거쳐 사간(司諫)이 되었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봉산(鳳山)에 유배되었으나 돈의문(敦義門)을 나서다 51세로 죽었다.
[학문과 사상]
일찍이 조광조와 교분이 있었으며, 뒤에는 이언적(李彦迪)과 같이 화를 당하였으니 그의 사상과 절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묘소]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수대리 산73-1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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