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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면 부상리 입석(龍山面 扶桑里 立石)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영동군(永同郡)

용산면 부상리 입석(龍山面 扶桑里 立石)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12. 25. 17:58

 

영동군 부상리 마을자랑비 옆으로 서있는 부상리 입석이다.

 

한참이나 오래전에 영동을 다녀오고는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제사 사진을 올린다

항상 마음속에서 내려 놓치 못했던 무언가 의 짐을 내려 놓았다는 표현은 조금 어울림이 적으려나?

 

 

부상리는 용산면의 서북쪽에 위치한다. 뒤로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내천이 흐른다. 벼와 포도를 주로 재배하는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부상골(부상동), 들말(평촌), 도내(도천), 웃도내(상도천), 큰골(대곡) 등이 있다. 부상골은 마을이 동쪽을 향해 있어 해 뜨는 것이 제일 먼저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들말은 들에 있는 마을로 땅이 평평하여 평촌이라고도 한다. 웃도내는 도내 위쪽에 있는 마을이며 큰골은 인가가 넓게 흩어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문화유적으로 민대혁 효자문이 있다

 

 

 

입석은 두기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자랑비 옆으로는 남근석이 자리하고 있으며 길 건너편으로는 여근석이 자리하고 있다.

 

입석(선돌)의 기능에 있어서는 대체로 선돌에 얽힌 전설이나 신앙이 주를 이루며, 예배의 대상물로서의 성격이 본질을 이루고 있다. 그 까닭은 선돌 자체가 가지는 외형적 특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뚝 솟은 모습에 따라 사람들에게 외경감을 불러일으킨다든가, 그 형태가 흡사 남성의 성기와 비슷해 생식기숭배같은 원시신앙과 결부되기도 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입석에 대한 외경 또는 예배, 기원()의 대상으로서의 성격은 원시사회에서 이루어진 정령숭배()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기념물 또는 신앙대상물로서의 입석은 처음 세워진 후 오랜 세월동안 기능을 유지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선돌은 입석(, menhir), 돌꼬지, 도두, 석주() 등의 명칭이 있다. 돌을 세웠거나 서 있다는 뜻에서 선돌 이외에 삿갓바위[], 선바위[]라고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구지바위, 할머니탑, 할아버지탑, 돌장승, 수구막이, 수살장군 등 으로도 부른다.

선돌의 크기는 높이 1~2m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근세에 이르러서 여기에 각자()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볏집이나 새끼로 묶는 등 의인화() 또는 신격화시켜 마을의 수호신, 기자암()같은 역할을 담당해왔다. 이러한 형태와 기능에 따라 여기에서부터 비석이나 장승의 원류를 찾고자 하는 연구가 시도되기도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더욱 많은 실증적 자료를 기다려야 할 처지이다.

선돌은 대부분 단독으로 마을 어귀같은 평지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고 간혹 낮은 구릉 위나 비탈에 세워지기도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고인돌과 바로 인접되어 있는 곳도 있다.

 

 

 

 

수호신석(雌雄石)은 1710년경부터 남석(男石)만 서 있었는데 가뭄이 극심했던 1940년경 어느 날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여석(女石:여자가 어린애를 업고 있는 형)이 울고 있는 장소를 알려주어 길골 7동의 장정들이 여석을 운반하여 마주보게 하니 그 후부터 마을에 안녕과 풍년이 들었다하여 지금도 마을 수호신으로 받들어 정월 대보름에는 제를 올리고 있다. 

 

여근석의 모습이 꼭 아이를 업은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것도 이채롭다.

 

 

 

 

선돌의 기능으로서는 첫째 암석·칠성·성기 숭배에서 나타나듯이 다산, 생생력, 장수를 바라는 풍요의 기능이다. 둘째 벽사()·수구막이 역할 등 수호 기능이다. 셋째 죽은 사람을 상징하거나 무덤을 표시하는 무덤 기능이다. 이러한 기능은 선돌에 얽힌 전설이나 관련된 신앙의 대상물로 본질을 이루고 있다. 선돌의 외형적 특질에서 사람들에게 외경심이 들게 하거나 마치 그 모습이 남성의 생식기와 비슷하여 성기숭배사상 같은 원시신앙과 결부시키기 때문이다.

 

 

 

 

 

부상리 마을자랑비의 원문을 올겨본다.

우리 마을 부상리는 대평(大平) 부상(扶桑) 도천(道川) 삼개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면적 3.9㎦에 157명이 현재 거주하고 있다. 매봉(鷹峰)산 자락에 터를 잡아 1759년에는 충청도 영동현 북이면 와촌(瓦村)리로 이름하였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부상리(해돋이마을)로 개칭되었다. 우리 마을은 약 350년전 청주한씨(淸州韓氏)가 자리를 잡은 것으로 추정되며 그 뒤 여흥민(驪興閔)씨 경주김(慶州金)氏 선산곽(善山郭)씨 개성김(開成金)씨 경주최(慶州崔)씨 밀양박(密陽朴)씨 양주조(陽州趙)씨 동래정(東萊鄭)씨 나주오(羅州吳)씨 제주고(濟州高)씨 전주이(全州李)씨 감해김(金海金)씨 영일정(迎日鄭)씨 합천이(陜川李)씨 등이 살고 있다.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면 고종4(1867)년 명성황후의 당질(5寸)인 민영주(閔泳柱)가 부상리 448-2번지 일대에다 99간의 기와집을 세우고 거처하다 상경하였다. 

1940년경에 마지막으로 헐려졌다한다. 고종29(1892)년에는 민대혁(閔大赫)에게 나라에서 동몽교관(童蒙敎官) 조봉대부(朝奉大夫) 직함을 추서하여 정려(孝子)문을 건립케 명하시어 현재 준문화재로서 후손들에 의해 잘 보존되고 있다. 또한 한문유(韓文裕) 처사(處士) 원봉(圓峰) 선생은 선비로서 최초로 서당을 개설하여 많은 선비를 배출하였으며 문하생들이 뜻을 모아 대평동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한다. 

앞에 서 있는 수호신석(雌雄石)은 1710년경부터 남석(男石)만 서 있었는데 가뭄이 극심했던 1940년경 어느 날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여석(女石:여자가 어린애를 업고 있는 형)이 울고 있는 장소를 알려주어 길골 7동의 장정들이 여석을 운반하여 마주보게 하니 그 후부터 마을에 안녕과 풍년이 들었다하여 지금도 마을 수호신으로 받들어 정월 대보름에는 제를 올리고 있다. 또한 서쪽에 있는 부상 형석(螢石)광산은 조선 말경부터 있었으나 한일합방 후에는 사업이 번창하여 전국에서 모여든 한산 인부가 300∼400명이 넘을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나 전국에서도 명성 있는 광산이었다 한다. 

한편 1946년에 부상국민학교가 인가되어 한때 학생이 600여명이 넘었을 때도 있었으나 도시 집중화 현상으로 인하여 1995년에 폐교되어 45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최근에는 사라져 가는 민속 길골 목도요를 재현하여 kbs 제1tv "일요산책 전국은 지금"에 방영된 바 있으며 전 주민이 합심하여 제24회(1991년) 난계예술제 식전 행사에 참여 목도요 디딜방아타령 쌍맹이질 등을 출연하였고 1994년에는 kbs 제1tv "맛따라 길따라"에도 전 주민이 참여하여 방영된 바 있다. 

교통편으로는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영동터널)가 본동을 관통하고 있으며 1993년에는 용산과 심천을 잇는 용심도로가 확포장 되어 마을 앞을 관통하고 있다.

 1983년에는 부상보건진료소가 국가 지원으로 개설되어 자체 운영되고 있으며 지역 보건사업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이 훌륭하신 조상님들의 품성과 높으신 덕을 날로 새겨 자손만대 후손들에게 가르침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온 마을 주민과 출향민 모두가 뜻을 모아 이 비를 건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