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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면 인차리 구봉영당(加德面 仁次里 九蜂影堂)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가덕면 인차리 구봉영당(加德面 仁次里 九蜂影堂)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1. 8. 09:49

 

 

 

 

 

구봉영당은 조선 고종 32년(1985)에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공인(左翼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에 봉해진 문충공(文忠公)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영정을 경기도 양주의 종가에서 옮겨 봉안한 사당이다.

 

 

 

 

고령 신씨(高靈申氏)문중에서 매년 3월 5일과 9월 5일에 향사한다. 이곳에 봉안된 영정은 세조 1년(1445)에 그린 좌익공신상(左翼功臣像)으로 추정되는데, 관복을 입은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가로 110cm, 세로 167cm의 설채견본(設彩絹本)이다.

오른쪽에 보한재 신숙주의 진영(眞影)임을 알리는 (朝鮮領議政高靈府院君諡文忠號保閑齋申叔舟字부翁眞)이라는 제자(題字)가 있고 왼쪽에 신숙주가 죽은지 75년 후에 다시 칠하였다는 (成廟乙未公卒後七十五年己酉改粧)란 기록이 있어 명종 4년(1549)에 개장(改粧)한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뒤에도 보채(補彩)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영정은 현재 보물 제6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의 영당은 1982년에 중건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2간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3개의 쌍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고 담장을 둘렀다.

 

 

구봉영당 앞에는 구봉영당의 중건과 평소 종친회를 위하여 수고한 신태호(申兌浩)와 신상우(申祥雨)의 공적비가 있다.

 

 

 

 

 

 

 

 

 

 

 

오사모()에 녹포() 단령(: 깃을 둥글게 만든 관복)의 관복을 입은 정식 초상화로서, 얼굴은 오른쪽을 향하고[] 의자에 앉은 전신상이다. 화폭은 비단을 이어 붙였으며 얼굴 표현이 들어가는 중간 부위는 넓은 폭을 사용하였다. 양 팔꿈치 부분에서 양 끝은 좁은 폭을 사용하여 결국 3폭이 이어져 있다. 이러한 연폭() 형식은 조선시대 전기의 초상화 가운데 원본()에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초상화 가운데 이 화상에서 흉배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흉배는 바탕천에 직접 금박 혹은 문양을 짠 수법이다. 후대의 자수 방식과 달리 명나라 제도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흉배의 문양은 구름과 기러기[]로서 문관2품 때의 도상이다. 즉 1455년 좌익공신( : 세조가 즉위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훈호) 때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화면의 오른편 여백에는 “조선 영의정, 고령부원군, 시호는 문충, 호는 보한재, 신숙주, 자는 범옹의 진영[]”이라는 제기()가 있다. 그리고 왼편에는 “성종조 을미년 공이 돌아간 후 75년 을사에 다시 장황하다[]”라고 적혀 있어, 1475년(성종 6년)에 개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화법에 있어 안면은 음영 처리가 되어 있는데, 후에 보채()되었다. 그 표현 기법으로 미루어 보아 개장 이후에 다시 가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살색은 선염이나 준찰()로 이루어져 있다. 눈꺼풀 및 동공 처리의 묵선에도 섬세성이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안면이 지닌 굴곡에는 자연스러운 선염 효과가 이루어져 착색()의 묘를 살리고 있다.

의복의 윤곽선 및 옷주름 처리 역시 절묘하다. 의복의 윤곽은 각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옷주름 처리는 필요한 부분에만 강인한 선으로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보다 의미 있는 것은 녹의()에는 진녹색 선으로, 빨간 내공()에는 붉은 선으로, 남색에는 진남색 선으로, 보라색에는 진보라 선 등으로 이른바 동색계()의 짙은 색선으로 처리하여 색감에 대한 배려가 눈에 띤다. 족좌대() 역시 남색에는 짙은 남색선을 두르고 고동색 나무에는 까만 선으로 테두리를 지워 윤곽선이 의식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필()과 묵()에서 모두 세련된 기법을 연출하였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안면과 옷주름에 구사된 선의 성격이 상이하다는 점이다. 얼굴은 부드러운 선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옷주름은 빳빳한 선으로 처리되어 그 다양함을 보여 준다. 신숙주 영정은 전신()의 묘미·필법·설채의 완전함이 전화면에 미친 가작()으로서, 작품 자체로서도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신숙주초상[申叔舟肖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에전에 영정을 모셨던 영당은 세월속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춰가고있다.

기와도 무너지고 돌담도 무너지고 찾는이 없는 곳에 산새들의 재잘거림만 가득하다.

보존하지 않을거면 저리 방치하지 말고 깨끗히 철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