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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읍 모정리 김사렴 묘소(梧倉邑 慕亭里 金士廉墓所)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오창읍 모정리 김사렴 묘소(梧倉邑 慕亭里 金士廉墓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1. 26. 07:55

 

오창읍 모정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문신 김사렴의 묘소이다.

모정리 입구에 신도비와 더불어 재실인 영모재가 자리하고 있으며 묘소는 후손들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다.

 

 

 

김사렴은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김은열(金殷說)의 둘째 아들인 평장사 김숙승(金叔承)의 10대손이며, 김방경의 4대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문사(文詞)에 능하였고 일찍이 공민왕 초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랑, 정당문학, 좌사간, 지제교 등 조정의 요직을 거쳐 안렴사에 이르렀다.  포은 정몽주(鄭夢周)·목은 이색(李穡)과 교분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직간으로도 유명하였다.

1365년(공민왕 14) 왕이 신돈(辛旽)을 총애하여 신돈에게 벽상삼한삼중대광 집현전대학사를 더하고 공신의 호를 내리자, 김사렴은 그가 고려의 사직을 위태롭게 할 인물이라고 탄핵하였다. "신돈은 바른 사람이 못되며 후에 반드시 정치를 어지럽힐 것이요, 그렇게 되면 고려의 사직은 장차 血食을 얻지 못하리이다"조야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김사렴이 홀로 탄핵을 한 것이다. 당시 정추(鄭樞)·이존오(李存吾) 등이 신돈을 탄핵하다 쫓겨난 뒤여서, 조야가 감히 신돈의 일을 말하지 못하였는데 홀로 이를 논하여 직언했다는 소리가 높았다.

영호남 지방의 안렴사로 외직에 재직하고 있을 때 드디어 이성계 일파가 고려를 찬탈하는 역성혁명이 일어났다. 공을 비롯해서 많은 신하들은 오직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만을 섬기고자 두문동 동지들과 규합하여 생사를 같이하면서 새 조정에 나아가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청주에 은퇴, 태조가 여러 차례 좌사간에 임명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도산(陶山)(충북 오창)으로 옮겨 은거하였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멀리하고 이태조가 개국한 한양 쪽을 향하여 앉지도 않았으며, 언제나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하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열녀불갱이부 충신불사이군)" 는 고사를 외웠다.

그리고 공은 조선조에 불복하고 오직 고려만을 사모하며 그 강개한 충성으로 의리를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耘谷 元天錫의 집에 모여 壇祀(단사)에 종참하였다. 당시 운곡은 고려말에 군벌이 설치고 국기가 흔들리면서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원주 치악산 밑에 숨어 들어가 시국을 개탄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살아가던 터였다. 그런데 혁명 역도들이 우왕, 창왕을 시해하고 훈구 대신들을 몰아내는 것을 보자 비분강개한 충성으로 비록 나라는 망해도 고려의 종사만은 끊어지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치악산 정상에다 계단을 설치하고 단군, 기자, 고려 태조 등의 열성과 변혁을 당한 왕들을 비롯하여 살신성인한 충신들을 종묘제례와 똑같이 제사를 올렸다. 이 단사를 變祀(변사) 또는 革祀(혁사)라고도 불렀는데, 이에 종참한 분들은 김사렴을 비롯하여 이양중, 최청몽, 서?, 탁신, 조승숙, 이집, 최원도, 조유, 김로, 음양동, 하자종, 성여완, 이?, 이원, 겅계성, 우성유, 방직범, 최양, 부종의, 설지유, 김약시 등인데 이에 참사한 분들은 모두 80인 이었다고 한다.

죽음에 임하여 “나는 고려의 옛 신하로서 이미 임금을 도와 국가를 존속시키지 못하고 나라가 망함에 또한 몸을 순국치 못한 천하의 죄인이니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선왕을 뵈옵고 선조를 함께 하겠는가. 내가 죽으면 깊은 산중에 장사하여 봉분도 짖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이미 前朝(=고려)에서 벼슬한 자는 다시 벼슬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후일 선비들이 유명평총(遺命平塚) 4자와 일편도산 만고수양(一片陶山萬古首陽) 8자로 시제를 삼아 글을 지어 그의 충절을 찬양하였다.

여말 8청의 한분으로서 추앙을 받았는데, 이분들은 고려 사직이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게 되자, 불사이군의 절의로 벼슬을 그만두고, 배록동에 은거하였는데, 공을 비롯하여 어은 金浚, 어촌 孔(마음심)府, 대은 李裕, 둔촌 李集, 대제학 尹珪, 사암 閔(마음심)兪, 송은 具鴻 등을 이른다. 배록동이란 이씨 조선에서 전조의 신하들에게도 봉록을 주었지만, 이들 고려의 절신들은 한 마을에 살면서 이를 거절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분들 모두 두문동 72현으로 모셔져 내려오고 있다.[위키백과]

 

 

 

비석의 전면에는 고려충신안렴사김공사렴지묘(高麗忠臣按廉使金公士廉之墓)라고 음각되여있다.

 

안렴사(按廉使)는 고려 시대 도(道)의 장관. 충렬왕 2년(1276)에 안찰사(按察使)를 안렴사로 개칭. 임무는 도내의 주현을 순안(巡按)하면서 첫째는 수령의 현부()를 살펴 출척하는 일, 둘째는 민생의 어려움을 살피는 일. 셋째는 형옥(刑獄)을 다스리는 일. 넷째는 조세의 수납. 다섯째는 군사적 기능에 관한 것이었음. 안렴사는 조선 시대와 달리 도에 상주하는 전임관이 아니라 사명지임(使)으로 임기는 대체로 6개월이었음.

안렴사 [按廉使]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