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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읍 모정리 김사렴신도비 (梧倉邑 慕亭里 金士廉神道碑)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오창읍 모정리 김사렴신도비 (梧倉邑 慕亭里 金士廉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1. 28. 11:45

 

 

 

 

 

 

 

 

 

 

 

 

 

 

김사렴(金士廉) 신도비

안렴사공 신도비문(按廉使公 神道碑文)

 

오직 金氏는 朴氏와 昔氏의 뒤를 繼承하여 徐羅(신라의 경주)에서 王이 됨으로부터 38世를 전하여 敬順王에 이르자 나라를 高麗에 移讓하고 그 子孫은 四方으로 흩어져 살게 되니 官界出身도 많고 名聲과 德望이 높은 大族으로서 그중 上洛花山(=안동 고호)에 살고 있는 자는 그 譜系가 가장 오래되었고 또 顯達하였다.

公의 先代에서부터 上洛(=안동)에 살았음으로 後世에 와서 花山人이라고 일컬었다. 高麗高宗때에 方慶 어른께서 계셨으니 벼슬이 翰林學士太尉平章事를 지내시고 일찍이 蒙哥篤(몽가독)을 挽留하여 椒島(초도)에서 사슴사냥을 못하게 禁하고 珍島와 耽羅를 平定하고 再次 일본을 征伐하여 功을 세우고 聖節祝賀使로 원나라에 들어가시니 元帝는 太淸宮에 大宴을 排設하고 席次를 亡命한 송나라 群臣보다 上席에 앉히고 虎頭金牌를 주니 陪臣으로서 金符를 차게된 것은 太尉公(=충렬공)으로부터 처음으로 시작된 일이다.

이 어른(=충렬공)께서 恂을 낳으시니 判三事를 지내고 諡號를 文英公이라 하였다. 이 분께서 永煦를 낳으시니 左政丞을 지냈으며 伯兄 永暾과 함께 조적의 난을 平定함으로써 功臣에 封하였다. 고려 忠惠王이 元나라로 잡혀갈 때에 侍從하던 百官들이 모두 달아나 숨고 하였으나 홀로 왕을 護衛하고 가지 않았다. 이 어른께서 蕆을 나셨는데 知密直司事를 지냈으니 공에게 고조 증조 조부 부친 4세가 되신다.

공의 휘는 士廉이요 스스로 號를 梧隱居士라고 하였다. 少時로부터 學問에 뜻을 두어 文詞에 能하셨다. 恭愍王 初年에 文科及第하여 벼슬은 按廉使를 지냈으며 정문충공 몽주와 이문정공 색과 더불어 서로 交友하였으며 모두가 바른 말 잘 하기로 유명하였다.

辛旽이 執權하매 왕과 公卿大夫가 모두 굽실거리며 그에게 기울어졌다. 14년에 旽에게 벽상삼한 삼중대광 집현전태학사를 封하고 수정이순 논도섭리 보세공신호를 주고 왕이 자주 微行으로 그 집에 나가서 공을 치고 연등회 (=고려때의 국가제전. 정월 보름날의 등불놀이)를 개최하고 상으로 銀甁(은병)과 안장 있는 말과 綾羅(능라-비단)와 繡緞(수단)등을 下賜하니 공이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旽은 바른 사람이 못 되며 後日에 반드시 政事를 混亂시키면 고려의 社稷(=정부)이 장차 血食(=피묻은 산 짐승을 제물로 바치어 제사 지낸다는 뜻, 血祀)을 누리지 못한다.” 고 하였다.

當時에 좌사의대부 鄭樞와 좌정언 李存吾가 旽의 處事를 말하다가 樞는 職位를 降等시켜 東萊로 보내고 李存吾는 長沙監務로 내쫓으니 朝廷과 백성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고 감히 말을 하는 자가 없었으나 公만이 홀로 正論을 提起하니 이로부터 剛直하다는 名聲이 國內에 떨쳤다.

이태조가 王位를 물려받음을 당하여 公이 마침내 淸州로 避身 隱居 할새 恒常 이태조가 있는 漢陽을 向하지 앉지 않고 매양 스스로 “烈女는 두 지아비를 고치지 않고 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는 古祠를 외웠다. 이태조가 公을 司諫院 左司諫으로 命하고 屢次 불렀으나 끝내 不應하시고 마침내 陶山(=청원군 오창면 모정리)으로 들어 가셔서 굳게 문을 닫고 일체 사람을 대하지 않았으며

臨終時에 여러 아들들을 돌아보시며 遺言하시기를 “나는 麗朝의 옛 臣下로서 이미 임금을 도와 나라를 保存치 못하고 나라가 亡하여도 또 따라 죽지 못하였으니 天下의 罪人이라. 무슨 面目으로 地下에 들어가 先王과 先祖들을 뵈올 것인가. 내가 죽거든 깊은 山中에 묻고 封墳도 하지 말고 表石도 세우지 말고 자손 중에서 이미 벼슬한 사람은 다시는 벼슬하지 말라” 警戒하시었다.

때문에 生存時의 文蹟과 其他 事蹟 및 生卒日時와 墓所등을 모두 紛失하여 傳하지 못하고 野史나 遺乘에 傳하는 것은 다만 이러한 것 뿐이다.

公이 돌아 가신제 300여년만에 後孫이 처음으로 石槨中의 誌文을 얻어서 살펴보니 公의 墓所인지라 지금의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陶山 子坐의 언덕에 모셨다.

숙종4년에 그 고을 儒生들이 發議하여 公의 祠堂을 松泉에 세우고 祭祀를 지내더니

그후 3년 되던 해에 儒生 李澤夏 등 120인이 大闕에 들어가 글을 올려 祠院에 대하여 이름을 지어 賜額하기를 請하니 왕이 關係當局에 명하여 善處하라고 하였으나 마침 朝廷에 일이 있어서 미처 施行치 못하였다.

公轍이 일찍이 高麗名臣傳을 짓는데 吉再와 趙狷(조견)과 南乙珍(남을진)과 元天錫(원천석)과 徐甄(서견) 및 公의 史實을 모아 逸民篇에 편입하였는데

再는 문하주서로서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선선에 들어가 은거하고

狷의 이름은 개견변(犭)을 땃는데 자신이 나라가 망하여도 죽지 못하였으니 개와 같다고 하여 狷자로 이름을 짓고 머리를 가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여생을 마치었고

乙珍은 태조와는 潛邸時(잠저시)로부터 親舊임으로 왕이 된 뒤에 반드시 데려 오고져 하여 누차 벼슬을 주고 불렀으나 나가지 않으니 왕이 그 뜻을 嘉尙히 여겨 그 살고 있는 고을을 봉하여 沙川伯을 삼고

天錫과 甄은 혹은 원주에 살고 혹은 衿川에 살더니 당시의 사람들이 망명한 죄로 벌을 주자하니 왕이 이르되 “백이숙제와 같은 인물이니 사면하고 불문에 부치라”고 하였으며

또 두문동의 諸賢 약간인을 모아 아울러 부록에 편집하였다.

슬프다! 고려말 혁명할 때에 절개를 지키고 이름을 이룬 선비가 많았다. 그런데 鄭麟趾가 史傳을 지을 때에 모두 빼놓고 올리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聖祖의 본의겠는가? 당시의 여러 신하들이 기왕부터 嫌疑(혐의)가 있어서 그 사람들을 말살시켜 전하지 못하게 한 것이니 이래서야 장차 어찌 앞날의 사람들을 격려하고 권장하겠는가?

대체로 슬픈 일이로다. 지금에 와서 공의 후손 亻+英(영)과 亨道(형도)와 瑞霖(서림)이 찾아와 碑銘(=비문)을 지어 달라고 간청하기에 公轍(공철)이 이에 여러 선생의 事蹟을 말미에 실리어 썩지 않고 오래 전하고자 하니 이 글을 읽는 자는 碑를 가리켜 史記라고도 할 것이고 道理도 명확하다고 이를 것이다.

公이 순흥안씨의 정당문학 순성군 元崇의 따님과 결혼하여 5남1녀를 두시니 장남은 안찰사 侃(간)이요, 2남은 정랑 湋(위)요, 3남은 절도사 淛(제)요, 4남은 소윤 瀹(약)이요, 5남은 좌랑 湜(식)이요 여는 목사 馬希遠에게로 출가하였다. 소윤공(=약)은 1남을 두셨는데 휘는 遇周(우주)요 지주사 벼슬을 지냈고 좌랑공(=식)은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自麗(자려)요 직장 벼슬을 지냈으며, 차남은 自荊(자형)이니 서령을 지냈다. 그 자손이 지금까지 17,8세를 내려왔다.

銘文에 하였으되 과감하고 강직한 태위공(=방경)이시며 공이 크고 높으시도다. 탐라를 평정하고 일본을 양차 정벌하여 이름은 중국까지 떨치고 금패는 번적거렸도다. 공(=사렴)이 그 뒤를 이어서 소년에 등과하여 간악한 辛旽을 배격함에 있어 言辭가 엄숙하고 義理가 분명하였으며 이태조가 등극함에 호걸이 구름같이 따르되 공과 친한 동지는 정문충공(=몽주)이 있더니 문충공은 이미 순절하고 공은 산중에 숨었도다. 나는 망명한 신하로서 정성을 전왕께 바칠뿐 이었도다.

옥새(=임금의 직인) 찍은 친서로 여러번 불러도 공의 뜻은 더욱 굳으니 殷나라에 三仁(=微子 箕子 比干)이 있어서 周나라의 광채를 빛냄과 같도다. 上黨 언덕에 4척 높이 무덤이 있으니 봉분도 말고 표석도 세우지 말라 한 것은 스스로 그 자취를 감추려 함이니 나라 사람들의 사모하는 마음은 어찌 그 極함이 있으리오. 거북바탕과 용머리 碑石이 墓門에 새겨 있으니 여러 강호제현 께서는 이 銘言(=碑文)을 敬虔(경건)히 하소서

가선대부 예조참판 동지 경연 실록사 성균관 대사성 규장각 직제학 지제교 外裔(예외) 南公轍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