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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읍 가곡리 동고정(梧倉邑 佳谷里 東皐亭 ) 본문
조선 광해군 4년(1612)에 역옹(轢翁) 이영길(李英吉, 1563~1659)이 세운 전의 이씨의 정자이다. 지금의 정자는 1950년에 중건하고 1983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2간이며 높이 2자의 주초석 위에 기둥을 세운 겹처마 팔작지붕의 2층 목조기와집으로 내부는 통칸 마루를 깔고 닭다리 난간을 둘렀으며, 1951년에 이석영(李錫永)이 쓴 "동고정(東皐亭)"이란 현판을 걸었다. 인조 7년(1629)에 이영길(李英吉)의 문인인 이의저(李懿著)가 지은 "동고정부(東皐亭賦)"가 있다.
조선 광해군 4년(1612)에 역옹 이영길(1563~1659)이 세운 전의 이씨의 정자이다.
지금의 정자는 1950년에 중건하고 1983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2간이며 높이 2자의 주초석 위에 기둥을 세운 겹처마 팔작지붕의 2층 목조기와집으로 내부는 통칸 마루를 깔고 닭다리 난간을 둘렀으며, 1951년에 이석영이 쓴 "동고정"이란 현판을 걸었다.
인조 7년(1629)에 이영길의 문인인 이의저가 지은 "동고정부"가 있다.
【동고정기 번역문】
청주 북쪽 30리에 상당산(上黨山)을 바라보며 산이 된 것이 있으니 곧 목령(鶩嶺)이다. 그 산세가 용이 서리고 범이 자리하여 남으로 꼬리를 두고 북으로 머리를 둔 것이 공목(孔鶩)이 노을을 타며 날개를 떨치는 듯하여 형세로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 웅대하고 험준함은 상당산에 미치지 못하지만 수려함과 아름다움은 그보다 낫다. 그런 까닭에 현인달사(賢人達士)가 종종 그 아래에서 나왔으니 기(氣)를 기르고 영(靈)을 모은 것은 속일 수 없다. 나의 방조인 역옹(櫟翁) 이 선생도 또한 그 아래에서 태어났는데 자질이 비범하니 사람들이 목령의 기운이 선생에게 모였다고 한다. 선생은 학문을 연마하고 문장을 지어 나라를 경영하고 세상을 구할 뜻이 있었으나 사마시에 합격한 것으로 마치셨다. 혼란한 광해군(光海君)의 패륜함을 당하여 시사(時事)가 날로 잘못되니 선생은 끝내 문을 걸고 자취를 거두어 오직 후학을 가르침을 자신의 일로 삼으니, 원근에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우러러 모여드니 70여 인에 이르렀다. 온 고을이 교화되니 비록 시정의 하찮은 사람들도 말이 온순하고 행동이 올바름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선생을 위하여 고을 사람들이 그 마을을 가공촌(歌孔村)이라 부른다. 가공촌 동쪽에 몇 칸 정자가 있어 동고정(東皐亭)이라 편액하였는데, 대저 선생이 늘그막에 세우고 그 마음을 노래하던 곳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것이 이제 300여 년이나 되니 정자 또한 그 만큼 오래되었다. 주춧돌은 오히려 온전하여 후손이 항상 그 유
지에서 서성이며 탄식하였다. 금년 봄에 비로소 중건의 논의가 일어나니 “선조의 정자를 영원히 없어지게 할 수 없고, 선조의 유업을 영원히 타락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장인을 모으고 재목을 구하여 옛 터에 더욱 기반을 넓히고 옛 모습보다 몇 배를 크게하니 정자의 크기가 수백 인도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장차 집안의 자제들과 고을의 수재들을 모아 교육하여 선생의 당시 구업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선조의 구업이 다시 일어나면 곧 공자, 맹자, 정자, 주자의 유업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된다면 동고의 몇 칸 정자는 땅위의 한 줄기 빛이 될 것이요 가공 마을은 다시 방송의 명성을 들을 것이며 목령은 유기(游氣)가 더욱 밝아질 것이니 어찌 옳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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