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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면 대신리 금성대군제단(米院面 大新里 錦城大君祭壇)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미원면 대신리 금성대군제단(米院面 大新里 錦城大君祭壇)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3. 17. 11:03

 

조선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화를 당한 금성대군(: 1426~1457)의 제단이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제단 형태인 ㅁ자형이다. 규모는 앞면 3m, 옆면 4m, 높이 1m이다.  이 제단은 금성대군의 신단()으로, 그의 부인인 완산부부인() 전주최씨의 묘소 오른쪽에 있다.

전주최씨의 묘소는 대군의 차증손인 홍양정()이 개장()한 것으로 전한다.

이 제단은 축조 당시의 묘제 방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2005년 8월 12일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제단은 전주이씨 금성대군파 종중에서 소유하며, 관리는 후손들이 맡고있다[문화재청]

 

금성대군은 이름은 유(瑜). 아버지는 세종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다. 1433년(세종 15)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참찬 최사강(崔士康)의 딸과 혼인했으며, 그 해 태조의 일곱 째 아들인 이방번(李芳蕃)의 후사로 출계(出系)하였다.

1452년에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 이유(首陽大君 李瑈)와 함께 사정전(思政殿)에서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 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왕의 보필 대신인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를 보호하기로 결심하였다.

1455년 왕의 측근을 제거하려는 수양대군에 의해 몇몇 종친과 함께 무사들과 결탁해 당여를 키운다는 죄명을 받고, 삭녕(朔寧)에 유배되었다가 광주(廣州)로 이배되었다. 그 해 수양대군이 단종을 핍박해 왕위를 선양받았다.

이듬 해 이에 불만을 품은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중심이 되어 단종 복위(端宗復位)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다. 그 결과 여기에 가담한 자들은 대부분 처형되고,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 때 그도 삭녕에서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순흥에 안치된 뒤,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모의해 고을 군사와 향리를 모으고 도내의 사족(士族)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일으켜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거사 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가 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세종의 여러 아들 중에서 다른 대군들은 세조의 편에 가담해 현실의 권세를 누렸으나, 홀로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아 위로는 아버지 되는 세종과 맏형인 문종의 뜻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그 뒤 1739년(영조 15) 정민(貞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에 육종영(六宗英: 안평대군외 6인의 종친에게 神主配享을 내린 일)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순흥의 성인단(成仁壇),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靑安)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한국민족문학대백과사전]
 

 

 

 

원본글의 출처는 이유의 시장(諡狀)이며 저자는 조현명(趙顯命)이고 원전서지는 국조인물고소고8 장광(莊光)이다.

 

아! 일에는 한때 억울하여도 백세 뒤에는 풀리는 것이 있으니, 대개 천도()에는 반드시 회복하는 운수가 있고 신리()에는 선()을 위한 보답이 있어서 더디고 빠른 데에는 때가 있을지라도 그 귀결을 요약하면 펴지는 데에서 끝나고 말기 때문일 것이다.

금성 대군()은 왕실의 의친()으로 장릉(, 단종())이 양위()할 때에 육신()과 선후하여 죽어서 그 곧고 충성스러운 큰 절의()가 해와 달과 빛을 다툴 만하니, 어찌 그리 훌륭한가? 숙종() 무인년(, 1698년 숙종 24년)에 명하여 단종의 위호()를 회복하고 육신을 포증()하여 제향하였는데, 그 성대한 일을 거행할 때에 유독 공에 대해서는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충의()의 혼이 지하에서 억울해 한 것이 대개 2백여 년이 지났다가 이제야 마침내 그것을 크게 풀었으니, 이른바 천도와 신리를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고 때가 더디고 빠른 것도 그 사이에 명수()가 있었던 것이겠다.

공의 휘()는 유()이고, 세종 대왕의 여섯째 아들이며, 단종 대왕의 숙부이다. 단종은 즉위한 3년 뒤인 을해년(, 1455년 단종 3년)에 세조에게 전위()하고, 병자년(, 1456년 세조 2년) 정월에 공의 집에 나가 살았다. 6월에 성삼문
() 등을 죽이니, 이들이 곧 이른바 육신()이다. 이때에 단종은 영월군()으로 내보내고 공은 순흥부()에 안치()하였으며, 얼마 안 지나서 공과 순흥 부사(使) 이보흠()을 또 죽이니, 실로 성삼문 등이 죽은 이듬해인 정축년(, 1457년 세조 3년)이다.

당초에 공이 순흥부에 이르러 이보흠과 마주하여 강개하며 눈물을 흘리고 산호() 갓끈을 주었다. 드디어 남방의 인사와 몰래 결탁하여 상왕(,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하고 하루는 공이 이보흠을 불러 좌우를 물리고서 격문()을 기초하게 하였는데, 순흥의 관노()가 벽에 숨어서 듣고 공의 시녀와 교통하여 격문의 초안을 훔쳐 달아났다. 기천 현감()이라는 자가 이런 말을 듣고 말 서너 필을 갈아타며 급히 쫓아가 그 격문을 빼앗아 먼저 서울에 들어가 상변()하였으므로, 이에 공과 이보흠이 잡혀 죽었고, 순흥부와 남방의 인사가 사형에 연좌된 자도 많았다. 이것이 공이 나라 일을 위하여 죽은 시말로서 사적()은 상세하지 않으나 ≪노릉지()≫와 ≪해동야언()≫에 보이는 것이 대략 그러하다.

당저() 무오년(, 1783년 영조 14년)에 공의 후손 이진수()가 투서하여 원통한 것을 호소하였는데, 임금이 대신에게 의논하여 비로소 명하여 육신과 마찬가지로 복관()하고 포증하였으니, 충성을 정표()하고 절의()를 권장하는 방법에 거의 유감이 없을 것이다. 아! 신하가 섬겼던 바에 충성을 다하여 때로는 하늘이 정한 것을 힘써 빼앗으려다가 마침내 자신을 죽이고 종족을 멸하게 되어도 후회하지 않으니, 대개 하늘의 도리와 사람의 윤리가 지극한 본성에서 나타나서 절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과 이공() 같은 이도 어찌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이 돌아가 모인 것을 몰라서 그러하랴마는, 이렇게 한 것은 다만 내 본성을 다하여 내 인()을 이뤘을 따름이다. 이제 우리 성상()께서 특별히 깊은 원한을 환히 씻어주고 밝혀 드러냄을 빛나게 더하라 명하였으니, 곧 숙종께서 무인년에 미처 겨를을 내지 못하였던 것으로서 또한 세조가 후세에 충신으로 삼으라는 가르침을 우러러 본받은 것이다. 성자 신손()의 계술()한 성대함이 아! 지극하도다.

공의 배위() 완산 부부인() 최씨()는 경절공() 최사강
()의 딸인데, 공이 화를 당할 때에 부인에게 유복자() 이맹한()이 있었다. 측실()의 아들은 이동()이다. 이맹한의 아들은 이연장()이다. 처음에 자손이 폐고()되었는데, 중종() 기묘년(, 1519년 중종 14년)에 특별히 명하여 거두어 서용()하고 이맹한에게 함종군()을 추증()하고 이연장을 동평군()에 봉하였으니, 혹시 정암(, 조광조()) 등 제현()이 건의한 것이 아니겠는가? 동평군 이후로 8, 9세 전하며 자손이 계속하여 번창하지 않았는데, 이진수()는 그 10세손이다. 공의 묘소는 전하는 것이 없고 최 부인의 묘소는 청주() 파현()의 묘향()인 묏자리에 있으므로 그 옆에 제단을 설치하고 공을 제사한다고 한다.

아! 공은 임금의 덕화()에서 배태()하여 그 성질의 아름다움과 덕행()의 아름다움이 기록할 만한 것이 많을 것인데, 국사()와 가승()에 다 상고할 만한 것이 없다. 다만 정승 경재() 하연()이 공을 위하여 ≪승은정기()≫에 대략 이르기를, “공은 덕기()가 맑게 빛나고 아량이 지극히 고상하며 사기()를 내면 한 점의 티끌이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선왕을 경모()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뿌리박혀 말에 애연()히 나타나니, 그 굳게 지키는 것이 뛰어남에 어찌 근본이 된 것이 없다 하겠는가?” 하였다. 대신이 의논하여 이보흠을 포증하기를 아울러 청하였으나, 이보흠은 자손이 없으므로 이진수가 장차 그 교지()를 공의 사당에 함께 보관해 둘 것이니, 더욱 슬플 따름이다. 나 조현명이 이조()에 있었으므로 일찍이 이진수의 상언()을 초기()하여 복계()하였는데, 이제 이진수가 시호()를 청하는 글을 부탁하니, 거절할 수 없어서 삼가 위와 같이 차례대로 서술하였다.

이유 [李瑜]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그 후 후손들에 의하여  "숭정4 임오 유명조선국금성대군시정민이공지단" (崇禎4 壬午 有明朝鮮國錦城大君諡貞愍李公之壇) 이라는 비석을 세우니 이곳이 미원면 대신리 산 49번지이다.

비석의 건립시기는 숭정4 임오 맹동이면 숭정4년 이면 1631년이여야 맞는데 1631년은 신미년이니 임오년과 일치하지 않는다.

혹여나 崇禎뒤에 後자가 표기되지 않은 임오년이라 가정하면 崇禎後4壬午년이면 1882년(고종19년)이 된다.

1739년(영조 15) 정민(貞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라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위의 조현명이 기술한 李 瑜(금성대군)의 내용과 함께 검토하여 보면 비석의 건립시기는 1882년 임오년(고종19년)이 맞는것이다. 

 

 

묘소가 실전될 경우 또는 죽은자의 시신을 찾지 못한 경우 후손들은 단소를 설치 제향을 올린다. 이를 유허단(遺墟壇)이라 한다.

대군도 영주시 순흥면에서 치명한 뒤 역적의 시신이라 감히 수습하지 못한채 내려오고 있었다. 대군의 단소는 후손들이 살고있는 청안현 대율리(지금의 북이면 대율리)와는 엄청나게 떨어진 미원면 대신리 신티에 있으며 부부인과 후손들의 선산도 이곳에 있다.

 

 

 

지금은 길이 잘닦여 있지만 옛날에는 첩첩산골이였다. 이 첩첩산골에 선산을 정하게 된 동기는 이러하다. 

미원면지에 의하면 대군의 증손 홍양정이 삼세봉작지은을 입게되자 공은 안동으로 가서 대군의 유품을 수습하여 돌아오게 되였다.

중종 기묘년(1519년)의 일이니 대군 치명(1457년)후 60여년이 지난 뒤였다. 홍양정은 유품을 모시고 오면서 가끔씩 "대군할아버지 따라오십니까?"하고 물으면 "가고말고 가고말고..." 하면서 대답이 있었는데 이 곳을 지날때는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이에 홍양정은 " 아 이곳이 대군의 만년유택(萬年幽宅)이구나" 생각하고는  유품을 묻고 단소를 세웠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이니 내용이 과장되거나 또는 흥미위주로 오기되기도 하는것 같다.

이 곳이 그리 좋은 곳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전해지는 이야기 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