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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면 대신리 금성대군 신도비(米院面 大新里 錦城大君 神道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미원면 대신리 금성대군 신도비(米院面 大新里 錦城大君 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3. 27. 10:21

 

미원면 대신리에 자리하고 있는 금성대군의 신도비이다.신도비옆으로는 신도비를 세우기 위해 힘쓴 사람들의 공적비군이 자리하고 있다. 신도비를 바라보며 문중의 산소는 왼쪽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하며 금성대군의 제단및 부인의 묘는 오른쪽 길을 따라 오르다. 곡선부위에서 산으로 오르는 소로를 따라 길을 5분여 재촉하면 금성대군의 제단을 만날수 있다.

 

 

 

대군의 휘는 유 자는 인지 호는 승은정이고 시호는 정민이다. 세종대왕 8년 3월 28일 출생하고 15년 계축 정원 16일에 금성대군으로 봉해지니  세종의 6남이고 문종의 아우이며 단종의 숙부다. 1436년 세종 18년에 성균관에서 학문을 닦아 당대의 문학가로서 명망이 높았다.그리로 대군께서는 천성이 강직하셨던 관계로 세조대왕이 어린 단종을 물리치고 즉위하심에 이에 항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노력하시다가 1455년 세조원년에 부처되고 노비와 가산을 몰수당하였으며 1457냔 2월에 순흥으로 이처되였다. 단종 3년 을해2년에 간신배 영의정의 정인지와 좌찬성 신숙주의 무소로 인하여 고신을 회수당하고 그해 윤6월에 경기도 삭녕으로 견배되고 다시 광주로 이배되였으며 병자년 6월에 경상도 순흥으로 안치되였다.

 

순흥 유배시에 부사 이보흠과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누설되지 순흥부는 도륙되고 대군은 안동으로 이계 시사되니 향년이 32세 세조 3년 정축년 10월 21이다. 배위는 완산부부인 전주최씨이니 좌찬성 증 영의정 시경절공 휘 사강지녀로 친가는 청주 북일면 대율리(대신리)이다.대군께서 삭녕으로 광주로 이배될 때 부인은 대율리 친정집에 하거 피화하면서 유복자 함종군을 낳아 양육했다.그 후 정축년 대군이 화를 당할때 시비의 아녀자와 바꾸어 기르게 하니 함종군은 성장하여 그 곳에서 기지를 정하고 살게 되였다. 대군이 사사된후 백골을 수습하는 자가 없어 묘소는 없다.그 후 나라에서 공주 동학사 숙모전에 대군과 절사한 영혼들을 초혼하여 배향하고 또 영남유생들이 순흥에 향화를 모아 춘추로 향화를 올리고 있으며 청주 북이면과 서원과 사우를 세워 춘추향사를 받들다가 서원훼철을 당하매 수의동에 사우를 옮겨 세우고 절사와 기제사를 바들어 왔다.금성대군은 원래 천질이 영준하고 기품이 탁월하며 시문필법은 안평대군과 버금갔다.세종대왕 잠저시 어느해 형제들과 삼각산을 오를때 층암석벽을 평지와 같이 다녀 호종하는 자가 따르지 못하였다.일찌기 서운방 화산아래 승은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는데 그 이름은 부왕이 하사하신 땅이라 선왕이 경모하여 지은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