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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면 미원리 한성판윤경주김공신도비(米院面 米院里 漢城判尹慶州金公神道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미원면 미원리 한성판윤경주김공신도비(米院面 米院里 漢城判尹慶州金公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3. 28. 15:08

 

미원면 미원3리 소리곡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 세조때의 문신인 김인민의 신도비이다.

 

 

 

 

한성판윤공 인민(仁民)은 경주김씨 계림군후(鷄林君後) 한성판윤공파(漢城判尹公派) 파조로서 게림군의 둘째아드님이신 휘(諱)자 중성의 셋째아드님으로서 초휘(初諱)는 천민(天民)이시며 태종원년(1401년)신사년 11월 28일에 출생하시어 천성이 인자하며 문절이 뛰여나 세종17년(1436)에 문과에 급제하여 자헌대부예문관 대제학 겸 한성판윤(資憲大富藝文館 大提學 兼 漢城判尹)으로 재임중 세조의 학정으로 단종 손위 부당성을 직언 청렴하여 성품이 강직하여 불의에 굴복치 아니하고 항상 정의에 앞장서서 검소를 생활신조로 하며 목민정치에 주력하여 만백성들의 추앙을 받는중 세조의 미움을 받고 간신들의 모략으로 삭탈관직하여 유배까지 거론되였으나 후비인 장수황씨가 당대에 유명한 익성공(翼成公) 황희정승(黃喜政丞)의 손녀로서 그분의 위덕으로 유배를 면하고 심산유곡인 상주목사로 좌천되시여 임지인 상주에 부임하시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기아에 헤매일때 조곡을 감하여 주는 등 혈민선정(血民善政)으로 정사를 하시다가 고만을 못채우시고 세조1년(1456)임지인 상주에서 향년 56세를 일기로 타계하시니 상주골에서는 경천대노하여 동헌뜰에는 조문객이 십리나 이여졌다고 하며 재직중 안민선정 하였으므로 고향 선영아래 안장하려 하였으나 수많은 백성들이 생전의 은덕에 감사하여 시신이라도 상주땅에 영안하시도록 간청하므로 유택을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군 화동면 이소리 문전동(쑥밭골)에 안잔하였으며 슬하에 6남2녀를 두었는데 초비(初枇)는 남양홍씨로 직장 홍우성의 여(女)로서 4남1녀를 두셨으니 첫째는 효경(孝卿)으로 훈련원(訓練院) 정(正)으로 통정대부를 지내시고 작고하신후 이조판서를 증직 받으셨으며 둘째는 춘경(春卿)으로 신사년(1461)에 문과에 급제하시고 경인년(1470)에 예조정랑을 지내시니 작고하신 후 가선대부병조참판을 증직 받으셨으며 넷째는 하경(夏卿)으로 승록대부 좌찬성겸 의금부판사를 지내시고 세자 시강원 이사를 지내셨으며 다섯째는 제경(悌卿)으로 통정대부교서관판교를 지냈으며 여섯째는 서경(恕卿)으로 계미년(1462) 문과에 급제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내시다가 작고하신 후 이조판서에 증직되였으며 정인년(1507) 향년 67세로 타계하시니 다섯째 여섯째는 후비 장수활씨에게서 출생하였으니 대대로 명문가의 정통을 이여 왔으며 그 후 판윤공의 묘소는 536년간 상주 문전동에 안치되였다가 1990년 6월 28일 문중의 결의로 지금의 충청북도 상당구 미원면 미원리로 이전하여 영세시년토록 하였다. 매년 음력 10월5일에 행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