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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용정동 것대산봉수대(龍井洞 巨叱大山 烽燧臺) 본문
걷기가 싫다면 차를 타고 오를수도 있다.
여유가 있다면 걸어서 산길을 올라도 시간이 그리 촉박하지 않으니 한번 도전해볼만 하다.
찾아가기가 초행이면 조금은 어려울 듯 하다. 네비를 찍으면 잘 안내를 해주지만 네비를 믿지 못하는 마음속에 욕심이 갈길을 어렵게 한다.
네비를 찍으면 상당산성가는길로 인도하여 좁은 도로를 지나 것대산쪽으로 인도한다.
올라가는길은 편도이며 가파른 산길이니 조심운전이 필요하다.
봉수대 옆에는 차량5-6대의 주차공간이 마련되여 있다.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하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내는 국가 긴급 통신 시설이다. 것대산 봉수대는 전국의 5개 봉수 노선 가운데 경남 남해의 금산 봉수에서 출발하여 서울 목멱산(남산)까지 가는 두 번째 노선이며, 고려시대부터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쪽으로는 문의 소이산 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으로 진천 소을산 봉수에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거차대 봉수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이후의 지리서에는 거질대산봉수라고 적혀있다. 이곳에는 별장 1인, 감관 5인, 봉군 25명, 봉군보 75명이 소속되어 교대로 봉역을 담당하였다. 평상시에는 1홰, 적군이 나타나면 2홰, 적군이 국경에 접근하면 3홰, 국경을 침범하면 4홰, 전투가 벌어지면 5홰를 올렸다고 한다.
봉수대가 만들어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봉수제도가 마련된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조선 고종 31년(1895) 봉수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그 기능을 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것대산 봉수대에는 다으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영조 때 영남에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 여러 읍을 점령하고 북상하여 청주 인근의 상당성을 점령하였다. 지략이 출중한 이인좌는 성을 점령하자 먼저 봉수대를 지키는 군졸들을 처치하여 반란이 서울에 전해지지 않도록 선수를 쳤다. 그리하여 봉수대의 신호가 보내지지 않게 되자 서울에서는 그의 모반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때 이 산 중턱에서 봉화둑지기를 하는 목노인이 선이라는 딸 하나를 데리고 나라에서 주는 급미(給米)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이인좌는 군사들을 보내서 그들을 모두 처치해 버리도록 하였다. 당시 목노인의 딸 선이는 같은 마을에 사는 백룡이라는 총각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그날 백룡이는 청주 고을로 자리를 팔러 갔을 때였다.
군사들이 들이닥쳐서 목노인을 불러내 그 자리에서 참살해 버렸다. 마침 선이는 백룡이를 마중 나가서 밖에서 기다리다가 아버지의 비명 소리를 듣고 집에 돌아와 보니 부친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으므로, 그날 군사들의 이상한 행동으로 보아 곧 급변이 일어났음을 직감하고 봉화둑으로 올라가서 봉화대에 불을 당기려는 순간 뒤를 쫓아온 군사들에 의하여 선이도 참살되고 말았다.
한편 청주에서 돌아온 백룡은 목노인이 죽고 선이가 보이지 않으므로 광에 있던 쇠스랑을 집어들고 급히 봉화둑으로 올라갔다. 그 봉화둑에 올라가보니 선이는 죽어있고 군사들이 멀리 돌아가는 모습이 보이므로 급히 뒤를 추격하여 몰래 기습하였다. 그들을 처치한 백룡은 목노인과 사랑하던 연인이었던 선이를 옥양목으로 싸서 타오르는 봉화불 속에 화장하고 눈물을 뿌리며 봉화둑을 떠났다
진천 소을산에서 것대산(484.0m)에 봉화가 오르는 것을 보고 그대로 안성으로 보냈다. 이렇게 하여 전달되기 시작한 봉화불은 서울 목멱산(남산) 제5지에 전해짐으로써 조정은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조정이 이인좌의 난을 토평하게 된 것은 이 것대산(484.0m) 봉화둑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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