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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척면 송강리 행정마을 손순효신도비(山尺面 松江里 杏亭마을 孫舜孝神道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산척면 송강리 행정마을 손순효신도비(山尺面 松江里 杏亭마을 孫舜孝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6. 22. 17:44

 

산척면 송강리 행정마을에 위치하는 손순효 신도비각의 모습이다. 신도비각은 붉은벽돌의 담장안에 위치하고 있다. 손순효의 신도비는 그의 문인 이창신(李昌臣)이 신도비명을 찬하였고, 1523년에 이찬(李澯)이 글을 써서 세우게 되었다.


행정마을에는 평해신씨의 재실인 청백재가 마을회관앞에 자리하고 있으며 신도비는 마을안쪽 사과과수원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손순효의 묘소는 신도비에서 과수원 안쪽으로 진입하면 무덤으로 통하는 돌계단이 보인다,

돌계단을 오르면 문인석과 석등등이 갖추어진 무덤에 이르게 된다.


 

 

 

 

 

조선 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이다.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경보(敬甫), 호는 물재(勿齋)·칠휴거사(七休居士). 증조할아버지는 손영(孫永)이며, 할아버지는 손유례(孫有禮)이다. 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손밀(孫密)이며, 어머니는 정선군수를 지낸 조온보(趙溫寶)의 딸이다. 신자의(申子儀)의 딸 사이에서 아들 손주(孫澍)가 있다.


1451년(문종 1) 생원시에 급제하고 1453년(단종 1)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457년(세조 3) 사헌부감찰 재직 중 문과중시(승진시험)에 급제하여 경창부승에 임명되고 이후 병조좌랑, 형조정랑, 사헌부집의, 사헌부전한 등을 지냈다. 1471년(성종 2) ‘시무17조’를 올려 채택되고 형조참의에 특진되었으나 직무상 과오로 상호군으로 전임되었다.

그 뒤 장례원판결사가 되어 소송 문제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하였으며, 1475년(성종 6) 부제학을 거쳐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승지, 도승지, 강원감사를 역임한 후 호조참판, 형조참판을 지내면서 연산군의 생모 왕비 윤씨의 폐위를 반대하기도 했다.

1480년 지중추부사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공조판서, 경기도관찰사, 대사헌,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485년 임사홍(任士洪)을 두둔하다가 성종의 비위를 거슬러 경상감사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우찬성을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중용(中庸)』, 『대학(大學)』, 『역경(易經)』 등에 정통했다. 또한 문장에 뛰어났고 대나무 그림에도 능하였다.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487년 『식료찬요(食療撰要)』를 저술했다. 문집으로 『물재집(勿齋集)』이 있는데 1726년(영조 2) 이세환(李世煥)의 발문이 붙어 간행된 것과 1876년(고종 13) 이돈우(李敦禹)와 손석래(孫錫來)의 발문과 허전(許傳)의 서(序)가 붙어 간행된 것이 있다.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 404번지 행정마을에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손순효 신도비가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 404번지에 있다. 1523년(중종 18) 손순효의 제자 이창신(李昌臣)이 손순효 신도비의 비문을 지었고, 이찬(李澯)이 글자를 새겼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