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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가면 잠병리 김덕원묘소(金加面 岑屛里 金德源墓所)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금가면 잠병리 김덕원묘소(金加面 岑屛里 金德源墓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10. 25. 09:26

 

김덕원(金德源)은 광산인으로 김예몽(金禮蒙)의 맏아들로 태여났다.

김덕원은 아버지인 김예몽과 사직() 조육안()의 따님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여났다.

김덕원()은 현감() 허훈()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후사() 없이 김에몽 보다 먼저 죽었고,

벼슬은 통훈 대부() 영천 군수()에 그쳤다.,

 


김덕원의 묘소는 광산김씨 묘역의 재실인 보추재를 보며 오른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묘비에는 통정대부예문관직제학광산김공덕원지묘 숙부인양천허씨부좌(通政大夫藝文館直提學光山金公德源之墓 淑夫人陽川許氏祔)라고 명기되여있다.

김덕원의 묘소앞에 석물은 모두 근래에 새로 제작하여 설치된것이다.

 

 

 

광산김씨는 김흥광을 시조로 하고 김예몽·김기덕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이다.

광산김씨의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신문왕의 셋째 아들로 장차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을 예견하고 무진주 서일동(현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이후 무진주가 광산으로 개칭되면서 후손들이 광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고려 초기 삼중대광에 오른 김길(金佶)로부터 8대에 걸쳐 평장사(平章事)를 배출하여 명문으로서 기반을 이루었으며, 15세손으로 대광에 오른 김정(金鼎)의 아들 김약채(金若采)·김약항(金若恒)·김약시(金若時) 3형제 대에서 더욱 번창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왕비 1명, 재상 5명, 공신 7명, 대제학 7명, 청백리 4명, 문과 급제자 265명을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부자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충주에 세거하는 광산김씨 중 대표적인 인물은 충훈도사를 지낸 김덕원(金德源), 성균관사예를 지낸 김성원(金性源), 사간원정언을 지낸 김윤문(金胤文), 홍문관수찬을 지낸 김철문(金綴文), 승정원좌승지를 지낸 김말문(金末文), 춘추관사관을 지낸 김내문(金乃文) 등이 있다.

충주의 광산김씨 입향조는 김예몽(金禮蒙)과 김기명(金己德) 두 명이다. 김예몽이 충주로 이주한 시기는 벼슬하기 전인 1400년대 초반으로 보이며, 벼슬길에 나아가 학관(學官), 예조판서를 지낸 후 1469년(예종 1) 병으로 사퇴하고 충주로 돌아와 별세한 후 후손들이 충주 일원에서 현재까지 살고 있다. 김기덕(金己德)은 1700년대 논산에서 살다가 충주가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현 충주시 신니면 모남리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후손들이 현재까지 세거하고 있다.

김예몽 묘와 김예몽 신도비가 충주시 중앙탑면 잠병리에 있고, 김기덕의 묘는 신니면 모남리에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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