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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가면 잠병리 김예몽묘소(金加面 岑屛里 金禮蒙墓所) 본문
금가면 잠병리 막고개에 위치하고 있는 광산인 김예몽의 묘지이다.김예몽은 광산김씨 충주 입향조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보(敬甫). 할아버지는 화(華)이고, 아버지는 사성(司成) 삭(朔)이며, 어머니는 조신우(趙臣佑)의 딸이다.
1429년(세종 11) 생원시를 거쳐 143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집현전정자(集賢殿正字)에 제수되었다. 그 뒤 저작랑(著作郎)을 거쳐 감찰에 제수되어, 1440년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과거의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등용시켰다.
1447년 집현전교리(集賢殿校理)로 승진하고, 문종이 즉위하자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가 되었다. 단종 때에는 집의(執義)·부제학(副提學)을 지내고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공신에 책록되고 호조참의에 올랐다.
그 뒤 1460년(세조 6)에는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서 사은정사(謝恩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사성(司成)이 되었다. 이때에 후학들에 대한 교육에 힘써 자주 시험을 보고 제술이 우수한 자에게는 반드시 포상하여 학문을 권장하였다.
그 뒤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가 대사성에 올랐고,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아들 성원(性源)과 함께 급제하여 한때 조정과 재야의 선망을 받았다. 이어 1468년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신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인 충주로 낙향하였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매우 뛰어나 시관이 되어 뽑은 인재가 거의 뒷날 조정의 현직을 차지하여 빙감(氷鑑)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성품이 온아하고 청렴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사부(詞賦)에도 능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공의 휘(諱)는 예몽(禮蒙)이고 자(字)는 경보(敬甫)이며 광주인(光州人)이니, 증(贈) 정헌 대부 의정부 좌참찬(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 행성균관 사성(行成均館司成) 휘 소(遡)의 아들이다. 공은 처음에 사직(司直) 조육안(曹陸安)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맏아들 김덕원(金德源)은 현감(縣監) 허훈(許薰)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후사(後嗣) 없이 공보다 먼저 죽었고, 벼슬은 통훈 대부(通訓大夫) 영천 군수(永川郡守)에 그쳤으며, 둘째 아들 김성원(金性源)은 통훈 대부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녹사(錄事) 정계소(鄭繼韶)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7남을 낳았는데, 맏이 김백문(金伯文)은 태학(太學, 성균관)에 들어갔고, 둘째 김중문(金仲文)은 공이 명하여 김덕원의 후사가 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따님은 별제(別提) 유개동(柳介同)에게 출가하여 3남 3녀를 낳았다. 후취(後娶)는 호군(護軍) 조수종(趙秀宗)의 따님인데, 아들이 없다.
공은 젊었을 때에 유림(儒林)에서 명성을 혼자 차지하여 세상에 우뚝히 뛰어났는데, 기유년(己酉年, 1429년 세종 1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임자년(壬子年, 1432년 세종 1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저작(集賢殿著作)에 보임되었고, 조금 지나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임명되어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연경(燕京)에 갔으며, 고관(考官, 주임 시관(主任試官))이 되어 진사(進士) 신숙주(申叔舟) 등을 뽑았는데, 이로부터 항상 지공거(知貢擧, 과거를 보이던 고시관(考試官))를 맡아 책시(策試)하였던 선비들이 죽 연달아 뒤를 이어서 재상(宰相)과 달관(達官)이 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추대하여 ‘사람을 명확하게 알아보는 감식(鑑識)이 있다’고 하였다. 세종(世宗)께서 일본(日本)에 사신(使臣)을 보내려 하여도 적합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는데, 공이 해외(海外)의 나라에 사명(使命)을 띠고 다녀와서 낌새를 드러내어 말할 것이 없다고 하자, 임금이 소중히 여겨 은례(恩禮)를 더 두터이 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447년 세종 29년)에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가 되었고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는데, 아들 김덕원이 초시(初試)에 합격하여 한때에 유가(遊街)하였으므로 빛나는 명성이 있었다. 이어서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오르고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옮겨졌다가 관등(官等)을 뛰어넘어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에 임명되었으며,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바꾸어 임명하였다가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올라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나갔다.
경진년(庚辰年, 1460년 세조 6년)에 정사(正使)로 연경에 갔다가 돌아오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고, 외직에 나가 강원 감사(江原監司)를 지냈다. 세조(世祖) 때에 발영과(拔英科)를 설치하여 문신(文臣)들을 고시하였는데, 공이 둘째 아들 김성원과 더불어 함께 합격하여 부자(父子)가 나란히 방방(放榜)되자 사림(士林)들이 부러워하고 흠모하였다. 무자년(戊子年, 1468년 세조 14년)에 정헌 대부의 품계를 더하여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임명하였는데, 이듬해 기축년(己丑年, 1469년 예종 원년)에 병환으로 중원(中原)의 사제(私第)로 돌아가서 이해 10월 10일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니, 수명이 64세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이 애통하게 여겨 조정에 임어하지 아니하였고 예부(禮部)에 명하여 별도로 부의(賻儀)를 내리는 한편 벼슬을 증직(贈職)하였으며, 매장(埋葬)한 곳에서 모두 서로 통곡하기를, “철인(哲人)이 죽었도다.” 하였다.
아! 공의 문장과 덕업(德業)은 백대(百代)에 우뚝하고 천재(千載)에 전해질 만하여, 훌륭한 두 아들이 가업(家業)을 전하였으니, 하늘이 공에게 또한 헛되이 태어나게 하지는 않았도다. 장차 장사지내게 되자, 태상시(太常寺)에서 공을 ‘문장에 능통하고 일에 경건(敬虔)하여 인망이 태산 북두(泰山北斗)처럼 높다’고 하여, 드디어 의시(議諡)하기를 ‘문경(文敬)’이라 하였는데, 임금이 ‘가(可)하다’고 하였다. 아들 김성원(金性源)이 후세에 영원히 전할 내력을 남겨 두려고 계획하여 이에 표석(表石)을 세우도다.김예몽[金禮蒙]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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