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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면 유하리 일가정(延豊面 柳下里 一可亭) 본문
연풍면 유하리 쌍천앞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이다.석옹 경광국이 말년에 은거하던 곳으로 지자체에서 접근성도 용이하게 계단등을 신설 해놓았다.일가정을 중심으로 여러 각자와 마애비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가까운 곳에 경저효자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경광국(慶光國) 1841(헌종 7)~1923조선 말기의 관리로 자는 성관(聖觀), 호는 혜산(惠山)·휴태후(休退後)·석옹(石翁),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순절공(順節公) 경의(慶儀)의 15세손으로 고종 때 음사로 북부도사(北部都事)를 거쳐 희천군수(熙川郡守), 영해군수(寧海郡守)를 역임했다. 1883년(고종 20)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재직 중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금위영(禁衛營)의 군율이 해이해져서 군사들의 복장이 음침한 색깔로 변질되었다고 지적하고, 무기고에서 비밀리에 무기를 빼내는자가 있다는 사실을 밀고하였다.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재필(徐載弼)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1884년(고종21) 갑신정변 당시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로 재직 중 개화당 인사들과 친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관련자로 지목되었고, 이후 행실이 패악하다하여 유배형을 당하였다. 1886년(고종 23)에는 부사과(副司果) 이재석(李在祏)이 그와 개화당의 관련성을 재차언급하며 국문(鞠問)에 처해서 처벌을 엄중하게 내려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 외에도 대간(臺諫)들이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지속적으로 올려서 유배지가 지도(智島)로 옮겨졌다. 그러나 대간들이 임금이 내린 처분이 미약하다고 지적하여 위리(圍籬)의 처벌이 가중되었으며, 가극(加棘)의 형벌이 추가되었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여원홍(黎元洪), 원세개(袁世凱), 이홍장(李鴻章) 등의 대신들과 동서 각국의 정세를 논하였으며 중국에서 7년 만에 귀국하였다.당시 박영효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국사에 참여해 달라는 간곡한 권고를 보수당의 세력이남아 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는데 불과 반 년도 못되어 박영효 일당이 실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을사조약(乙巳條約) 당시 그 조약의 불가함을 통렬히 비난하는 소위 을사오적의 매국행위를 논박한 이제순(李齊純) 상소문에 깊이 관여하였다. 1913년에는 고향인 연풍면 유하리(柳下里)에 일가정(㊀可亭)을 짓고 여생을 조용히보냈다. 묘소는 연풍면 유하리(柳下里)에 있다.
[괴산인물지 참조]
일가정(一可亭) 경광국(慶光國) 〔1841-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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