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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면 적석리 의병박문영의적비(延豊面 積石理 義兵朴文永懿績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연풍면 적석리 의병박문영의적비(延豊面 積石理 義兵朴文永懿績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11. 27. 16:50

 

박문영 선생은 우리 의병사에 길이 남는 업적을 이룬 충북출신의 의병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면서 전국각지에서 항일의병들이 봉기하였다.1896년 1월 고종의 밀지를 받은 운강 이강년이 문경 가은에서 항일의병을 일으키니

박문영은 그들과 연합하여 의병을 모집 훈련을 하는 한편 조령과 수안보 등지에서 왜병을 물리치는 전과를 이루어 낸다.


왜병들이 매국대신들과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니 선생은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일대에서 수십회의 혈투로 많은 왜적을 물리쳤다.


 

특히 1907년에 갈평리와 9월에 죽령에서의 왜병과의 싸움에서 많은 왜병을 사살하여 의병사에 길이 빛날 공훈을 세우게 된다.

1908년 충청도 청풍에서 왜병의 기습으로 많은 장졸등이 전사히고 생포되였다.

선생은 적석리 백미산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다시 전열을 다듬어 많은 독립유지들과 연락을 주고 받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셨다.




박문영 선생의 의적비는 연풍면 입석리에 후손에 의하여 1995년에 세워졌다.

비석의 전며에는 의병박문영선생의적비(義兵朴文永先生懿績碑)라고 새겨져 있으며 비의 후면에는 선생의 업적이 상세히 기술되여 있다.

운강 이강년등과 합세하여 충청도 경상도쪽에서의 의병활동으로 왜병에게 많은 피해를 준것으로 전해진다.


 

 

의병 박문영선생과 연관된  인물로 운강 이강년선생을 빼놓을수 없다.

일제의 을미사변으로 운강 이강년은 격분을 견디지 못하고 땅을 치고 통곡하면서 “이제 나라는 영 망하였다. 억만인의 백성이 모두 짐승이 되고 오백년 예의의 나라가 오랑캐의 것이 되고 말았구나! 수 천 년 성인의 도리가 더러운 땅이 되었구나!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사생화복(死生禍福)을 돌아 볼 겨를이 없다.”하고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평소 친분이 있어 가까이 사귀던 판서 심상훈(沈相薰)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인근의 유림들과 동지들에게 기병의 뜻을 전하는 한편, 가산을 정리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고 사촌 이강수에게서 2백냥을 받아서 무기를 마련하였다.

운강은 1896년 2월 23일 유림인사들의 문중과 산포수, 농민군 등으로 문경 가은 장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병의 동기와 목적을 자세히 설명하고 의병봉기의 당위성을 천명한 다음 창의대장에 올라 의병의 편제를 정하고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이시절 박문영 선생은 충북인으로서 이종국과 함께 이강년부대와 의병을 모집 연합하여 참여하게 된다.



 

문경에서의 이강년의 활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호좌의병부대의 유격장이 된 이강년은 먼저 수안보의 일본 병참기지를 공격하여 조령 일대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1896년 3월 19일(음력2.6) 이강년은 전군장 홍대석 부대와 함께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적의 견고한 방어태세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창방면으로 퇴군하였다. 3월 26일(음력 2. 13)에는 중군장 윤기영 부대와 함께 조령의 일본군 병참을 공격하여 군기고를 부수고 화약 · 탄환 · 유황 · 조총 등 62점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한편 장기렴의 관군이 남한산성의 의병부대를 격파하고 충주로 이동, 가흥의 일본병참부대와 합세하여 제천의 호좌의병부대를 공격하였다.

지금도 충주 가금면의 가흥에는 일본병참부대의 흔적이 남아있다.


호좌의병부대는 5월 25일 장기렴의 군대와 맞서 제천 남산성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많은 희생을 내고 참패하고 말았다.

남산 방어선이 무너진 후 제천의병부대는 단양에서 의병부대를 수습하여 영월 · 정선 · 평창을 거쳐 관서지방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일부 병력은 만주로 넘어가 후일을 도모하였다.

운강은 후군 부대를 이끌고 호좌의병부대의 후미에서 관군의 추격을 막게 하는 가운데 영월에 이르렀는데, 형세가 어려워져 8월에 소백산중으로 들어가 군사를 해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