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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신라 비석에 얽힌 사연 본문
[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⑫ 신라 비석에 얽힌 사연
국민일보 | 입력 2010.04.25 17:29 | 누가 봤을까?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쓴다. 하늘 앞에 맹세하노라.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성의 도를 확실히 잡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맹세를 어기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얻게 될 것이다. …시(詩) 상서(尙書) 예기(禮記) 춘추전(春秋傳)을 차례로 익히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 한다."
1934년 경주시 석장사터 부근 언덕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보물 1141호)의 내용입니다. 신라 진흥왕 때인 552년 혹은 진평왕 집권기인 612년, 두 화랑의 맹세를 기록한 글로 알려진 이 비석은 6월 20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 신라실에서 열리는 테마전 '6세기 신라를 보는 열쇠-문자(文字)'를 통해 첫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전시에서는 신라 영토 확장을 기록한 '북한산 진흥왕순수비'(국보 3호), 지난해 5월 포항시 도로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국내 최고(最古)의 신라비인 '중성리비'(501년 제작 추정)와 '영일 냉수리비'(503년 제작 추정·국보 264호) 복제품, 성을 쌓으면서 3년 안에 성이 무너지면 죄를 묻겠다는 서약을 적은 '남산신성비' 등도 볼 수 있지요.
6세기의 신라는 비석의 시대입니다. 당시 신라는 우경(牛耕)을 통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기반으로 중앙통치체제를 갖추었고 율령 반포, 영토 확장 등으로 나날이 성장하는 국가였지요. 신라인들은 그 왕성한 기운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문자를 돌에 새긴 비석을 곳곳에 세웠다는 겁니다.
이 가운데 영일 냉수리비에서는 '교(敎)', 즉 판결 내용을 내린 주체가 갈문왕을 비롯한 고위급 관리 7명인 데 비해 포항 중성리비에서는 중간급 관위(官位)인 아간지(阿干支·6등) 2명만 등장하는 것으로 미뤄 "냉수리비문이 대법원 전원재판 판결문인 데 비해 중성리비문은 대법원 단독심리 판결문"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신라 비석의 내용도 그렇지만 발견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지는 않았지만 지난해 10월 경북 경주시의 한 주택 마당의 수돗가 콘크리트 바닥에 박혀있던 문무왕릉비(682년)의 윗부분은 눈 밝은 수도검침원 덕분에 빛을 본 것이죠.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문무왕릉비는 조선시대 1796년(정조 20년)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의 '이계집(耳溪集)'에 발견 사실이 기록된 이후 2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유물입니다.
발견 당시 한 언론은 이 비석이 빨래판으로 쓰였다고 보도했다가 "그런 적 없다"는 집주인의 거센 항의에 정정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답니다. 1979년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는 당시 마을 사람들이 빨래판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지요.
석비는 문헌자료가 부족한 고대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대부분 국보로 지정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문무왕릉비 윗부분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보존처리하고, 전문가들이 석비의 가격을 평가한 뒤 소유자에게 보상할 계획이랍니다. 평소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 소중한 문화재일지도 모르니 여러분들도 두 눈을 크게 뜨고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문화부 선임기자
< goodnewspaper ⓒ 국민일보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전시에서는 신라 영토 확장을 기록한 '북한산 진흥왕순수비'(국보 3호), 지난해 5월 포항시 도로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국내 최고(最古)의 신라비인 '중성리비'(501년 제작 추정)와 '영일 냉수리비'(503년 제작 추정·국보 264호) 복제품, 성을 쌓으면서 3년 안에 성이 무너지면 죄를 묻겠다는 서약을 적은 '남산신성비' 등도 볼 수 있지요.
6세기의 신라는 비석의 시대입니다. 당시 신라는 우경(牛耕)을 통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기반으로 중앙통치체제를 갖추었고 율령 반포, 영토 확장 등으로 나날이 성장하는 국가였지요. 신라인들은 그 왕성한 기운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문자를 돌에 새긴 비석을 곳곳에 세웠다는 겁니다.
이 가운데 영일 냉수리비에서는 '교(敎)', 즉 판결 내용을 내린 주체가 갈문왕을 비롯한 고위급 관리 7명인 데 비해 포항 중성리비에서는 중간급 관위(官位)인 아간지(阿干支·6등) 2명만 등장하는 것으로 미뤄 "냉수리비문이 대법원 전원재판 판결문인 데 비해 중성리비문은 대법원 단독심리 판결문"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신라 비석의 내용도 그렇지만 발견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지는 않았지만 지난해 10월 경북 경주시의 한 주택 마당의 수돗가 콘크리트 바닥에 박혀있던 문무왕릉비(682년)의 윗부분은 눈 밝은 수도검침원 덕분에 빛을 본 것이죠.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문무왕릉비는 조선시대 1796년(정조 20년)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의 '이계집(耳溪集)'에 발견 사실이 기록된 이후 2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유물입니다.
발견 당시 한 언론은 이 비석이 빨래판으로 쓰였다고 보도했다가 "그런 적 없다"는 집주인의 거센 항의에 정정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답니다. 1979년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는 당시 마을 사람들이 빨래판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지요.
석비는 문헌자료가 부족한 고대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대부분 국보로 지정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문무왕릉비 윗부분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보존처리하고, 전문가들이 석비의 가격을 평가한 뒤 소유자에게 보상할 계획이랍니다. 평소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 소중한 문화재일지도 모르니 여러분들도 두 눈을 크게 뜨고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문화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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