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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면 적석리 반계정(延豊面 積石里 攀桂亭) 본문
반계정(攀桂亭)이란다. 더위를 잡는 집이라 이름을 칭하였으니 이름에서도 벌써 시원한 냄새가 나는것 같다.
커다란 암반위에 정자를 짓고 문인들과 함께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던 지난시절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 하다.
조선 후기에 장암 정호(鄭澔, 1648~1736)라는 분이 있다. 그는 수암 권상하와 함께 김장생,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로 노론의 선봉에 서서 활발한 정치적인 활동을 한 정치가였다.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이다. 장암의 고조는 그 이름도 유명한 송강 정철이다. 부친인 정경연(鄭慶演, 1604~1666)은 천거로 영릉참봉에 임명된 후 사헌부감찰, 청안현감, 평릉도찰방 등을 역임하였는데 청렴결백하고 성실하다는 평을 들었다. 1665년(현종 6) 평릉도찰방의 임기가 끝나자 벼슬을 그만두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충주 노은면으로 내려와서 여생을 보냈다.
장암은 어린 시절을 충주에서 보냈다. 어릴 때부터 기질이 남달라 단정하고 정숙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20세를 전후해서 입신양명하기를 바라는 모친의 뜻에 따라 시문(時文)에 힘을 쏟는 한편 우암의 문하를 왕래하며 질의문학(質疑問學)하였다. 41세에 장암이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에 물러나 있을 때 우암은 장암에게 책을 보내며 “지금 세상 사람들은 과거에 급제하고 나면 할 일이 다 끝난 것으로 여겨, 그만 서책과는 멀어져서 일생을 그르치고 마니, 두렵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글 읽기를 권면하기도 하였다. 우암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타계하자 경성에서 복을 입고 스승에 대한 예를 다하였다. 그때 지은 1,471자에 달하는 장문의 제문은 스승에 대한 장암의 비통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장암은 자신의 논리에 반하는 반대당에 맞서 온몸으로 싸웠으며 화복(禍福)으로 인해 동요되거나 진퇴(進退) 때문에 태도를 바꾼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대의를 밝히고 종사를 위해서는 하지 못할 말이 없었다. 한마디로 그의 성격과 사람됨은 ‘강직(剛直)’그 자체였다. 그는 강직한 성격으로 언제나 반대당의 표적이 되었고 늘 언쟁의 중심에 섰다. 그는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장암은 1690년 (숙종 16)에 대간의 탄핵으로 사판에서 삭거되는 시련을 겪게 된다. 평소 산수를 좋아한 장암은 이 일을 겪은 뒤로 세상에 뜻을 버리고 입산(入山)할 생각을 하였는데, 마침 괴산 연풍의 장암에 ‘반계정(攀桂亭)’을 짓고 그곳에 우거하였다. 반계정은 주자의「초은사(招隱詞)」에 나오는 “계수나무 가지 부여잡고서 오래 머무노라(攀援桂枝聊淹留)”에서 그 뜻을 취한 것이다. 반계정을 얻게 된 경위가 다음의 글에 보인다.
재주 없는 나는 세도에 잠깐 쓰였다가 과연 낭패를 당하여 늦게야 비로소 후회하고는 (속세 일을) 접고 돌아와서 풍진 밖에 살려고 하였네. 시내와 산을 물어보다가 깊고 그윽한 연풍 서쪽에 있는 장암이라 불리는 곳을 얻었네.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으며, 수석이 맑고 밝아서 나물 캐고 낚시할 만하였네. 그윽하고도 묘하여 바로 내 바람에 들어맞기에 여생을 마치기로 맹세하였네.
당시 원근의 선비들이 장암의 풍모를 듣고 와서 배우는 자들이 많았다. 장암은 그들과 날마다 경사에 대해 토론하고 비록 거친 밥도 잇지 못할 만큼 가난하였지만 근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암의 반계정이 완성된 직후 수암 권상하는 “고인이 뜻밖에도 은거할 계획 가지니, 이 세상에 도리어 은자를 보겠네. 넝쿨 길 밖에 천향 풍겨 보내지 말고, 백운 속에 맑고 고운 기상을 잘 간직하소.”라고 하면서 계수나무가 지닌 맑고 고운 기상을 반계정에서 잘 간직하라는 당부의 뜻이 담긴 시를 지어 보냈다.
반계정은 괴산~연풍간 구 34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연풍면 적석리 장암(丈巖) 일명 장바위마을 입구 커다란 반석위에 동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앞으로는 쌍천이 흐르고 천 너머로는 들판과 산이 펼쳐져 있어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이 정자는 [여지도서] 1872년 제작된 연풍현 지도 등에도 장암정(丈巖亭)이라고 정자의 이름이 기록되여 있다.
이 정자는 영조대에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 까지 지냈던 장암(丈巖) 정호(鄭澔1648~1736)가 노후를 보내며 후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마을 이름인 장바위 마을도 정호의 호인 장암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정호의 스승인 우암 송시열 선생과 친구인 권상하 선생도 이 곳 산수경관에 매력을 느끼고 자주 찾아와서 옛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인 한수재 권상하가 1702년(숙종 28)3월 11일에 화양동으로 스승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정호의 집에 유숙하면서 지은시의
반계정의 옛모습이 보인는것 같다.
별다른 봄빛 선가에 있음을 알겠거니 - 선가지유별반춘(仙家知有別般春)
오솔길에 새론 꽃 사람을 끌어가네 - 협로신화해인인(夾路新花解引人)
가랑비가 한 차례 시내 위를 지나가니 - 소우일번계상과(疏雨一番溪上過)
돌 뜨락 소나무집 깨끗하여 티끌없네 - 석단송사쟁무진(石壇松社淨無塵)
현재의 정자는 한국전쟁 때 병화(병화)에 의해 소실되였던 것을 1971년에 다시 재건한 것이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2칸의 겹치마팔작지붕 건물이다.평면은 남쪽부터 1칸의 마루,2칸의 방으로 구성하고 전면에 툇마루를 두었다.
남쪽의 마루는 사다리꼴의 고주초석을 놓고 누마루를 높게 설치하였으며 전면과 측면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다음의 시는 장암이 반계정에 쓴 것이다.
바위에 기대고 돌을 시렁삼아 새 정자를 지으니
동북으로 평평히 십리 물가에 임해 있네.
고개 넘어 자는 구름은 반벽에 머물러 있고
수풀 너머 찬 달은 빈 창을 비추네.
금단의 약속 있어 연단할 만하고
물색은 시기하지 않아 눈길이 문득 정답구나.
절로 우스워라. 임금 그리는 정성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난간에 기대어 북두성을 가리키네.
倚巖架石起新亭, 東北平臨十里汀.
過嶺宿雲留半壁, 隔林寒月透虛櫺.
金丹有約形堪鍊, 物色無猜眼却靑.
自笑戀君誠未已, 凭欄猶指北辰星. 「秋夜, 登新成亭子, 書懷.」
시제에서 드러나듯 새로 지은 반계정에 올라서 가을밤의 회포를 쓴 것이다. 수련(首聯)과 경련(頸聯)에서는 바윗가에 기댄 정자가 동북쪽으로 평평한 물가에 연해 있고, 구름이 보이고 달빛이 창에 비치는 아름다운 산수의 정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고 읊었다. 함련(頷聯)에서 시인은 그윽한 곳에 있으니 불로장생의 묘약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눈에 닿는 물색이 정답기 그지없으니, 매우 만족해하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미련(尾聯)의 ‘연군(戀君)’과 ‘북극성(北辰星)’의 시어를 통해 흡족한 시인의 마음 한 켠에 세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상을 잊고자 들어온 장암이지만 여전히 임금과 조정과 나라에 대한 고민을 떨치지 못했던 것이다. 장암의 생활은 온전한 귀거래가 될 수 없었다. 벼슬에 제수되었다가 소척을 받으면 이곳에 내려오기를 몇 차례 반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생활은 거칠고 때로 과격하기까지 한 현실 생활에서 벗어나 풍류와 한담이 넘치는 시정(詩情)을 쏟아내게 하였다
건물구조는 자연석암반위에 남쪽을 제외한 남면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그 위에 원형기둥을 세웠다.
전면 기둥머리에는 초익공과 수서형의 이익공으로 공포를 구성하였으며 창방위에 소로를 배치하여 장여와 도리를 받치고 있던 소로수장집이다.
전면 각칸의 창호는 궁판이 있는 4분합 띠살문을 설치하였다.
이 정자는 풍류 관망기능외에 독서와 휴식을 겸한 강학의 성격도 함께 띤 별서 건축이다.
반계정옆에서 기거 하시며 반계정을 돌보시는 분입니다.
존함도 여쭤보지 못하고 사진 한장 박아드리는 것으로 고마움믈 표했습니다
당신이 어린시절 아버지와 친구분들이 반계정에서 시를 읊고 넓은 반석위에서 먹을 갈아 한시를 쓰던것을 기억하고 게셨습니다.
자꾸만 퇴락해져 가는 반계정의 모습을 보며 옛것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새로운것만 쫒아가는 현실의 모습속으로 사라지는 세월을 느꼈습니다
조상들의 옛모습을 회상하며 온고지신(溫故知新)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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