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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남차리수살(曾坪邑 南次里 水殺)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증평읍 남차리수살(曾坪邑 南次里 水殺)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3. 11. 08:39

 

증평읍 남차3리 장천마을(長川)에 있는 수살(水殺)이다. 

증평에서 율리와 미원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넓게 위치하고 있다.

수살의 유래가 적혀있는 유래비와 제단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마을주민들에 의하여 고사를 받고있다.

 

장내마을은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는 ‘장내(墻內)’로 기록되어 있고,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장천(長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고유 지명은 없이 ‘長川’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장내’는 ‘장’과 ‘내’로 나뉜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의 ‘장내(墻內)’라는 기록에 따르면, ‘담 안’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이나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의 ‘장천(長川)’이란 기록에 따르면, ‘긴 내’가 되어야 한다. 이 마을이 삼기천 가에 있음을 주목한다면, 후자의 설명이 설득력이 있다.

 

 

 

수살매기(水殺-) ‘수살매기’는 ‘수살막이’의 ‘이모음역행동화’ 어형이다. ‘수살막이’는 ‘수살’ㆍ‘살막이’ㆍ‘수살목’이라고도 부르는데, ‘시골 동네 어귀에 서 있는 돌이나 나무’를 말한다. 동네를 수호하는 신성한 것으로, 전염병이 유행할 때 새끼줄을 쳐서 모시며 또한 병이 낫기를 바라면서 환자의 옷을 걸어 놓기도 한다. 이는 흔히 ‘살방’ㆍ‘수살방’ㆍ‘수살목’ 등의 뜻을 가진 풍수지리상의 비보(裨補)에서 유래된 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장내마을은 고려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여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앞에는 강같은 냇물이 장유수(長流水)를 이루어 흐르고 마을 뒷편에는 수려한 옥녀봉이 우뚝 솟아 그야말로 산좋고 물좋은 고장이였다.

그러나 몇년에 한번씩 내리는 홍숴로 수해를 당하곤 했다. 전답의 유실과 가옥의 침수를 막기위해 마을 위쪽 숲에 가서는 마을의 안녕을 빌고 마을 아래쪽에 와서는 전답인 농토의 유실을 막아달라고 고사를 올린것이 오늘의 수살고사이다.

 

예전에는 마을 윗쪽에 있는 수살을 숫수살이라 하여 숫수살에게 먼저 고사를 올리고 마을 아랫쪽 수살은 암수살이라 하여 숫수살에게 먼저 고사를 지낸후 암수살에도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어느 병술년 천지개벽과도 같은 근 홍수때 숫수살이 떠내려가다 이 곳 암수살이 있는곳에서 정착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안수수살고사를 한곳에서 올리게 되였다.

 

이곳 수살고사를 지내고 있는 거리를 수살거리라고 하는데 이조시대 세종대왕과 세조께서 초정약수터에 오셔서 요양을 하실 때 청안현감이 문안을 드리러 갈 때  이곳 수살에서 의관을 정제하고 가신곳으로도 유명하며 바로 옆에는 청안현 남면 남창이 있었고 그 근처에는 남창관리들과 길손들이 이요하던 주막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또한 이곳  수살거리는 이정표 노릇을 했으니 미원 청천 내수 증평 청안이 각각 이십리요 청주 진천 음성 괴산이 각각 오십리로 통한다

이곳 수살고사는 음력정월 보름날 자시에 모시다가 차차 시대의 변천에 따라 지금은 정월 열나흘 해시에 고사를 올리고 있다.

숫수살은 비듬나무(느티나무)이고 암수살은 팽나무이며 군보호수로 지정되여있다

주민들의 간절한 소망은 지성과 성심으로 수살고사를 올릴때에 재앙은 오지않고 주민 모두가 화합하고 행복이 넘치는 마을로 세세년년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염원함이 유래의 진정한 뜻으로 사료되여 이곳에 유래비를 세웠다 / 2013년 12월. 

 

 

 

마을이름에도 많은 전설이 있지만 힘들고 어려웠던 그 시절 힘듬과 어려움을 일종의 해학으로 웃어넘기는 이야기꾼들의 이야기도 있다

많은곳에서 전해지는 자린고비의 이야기를 이곳 마을지명인 장내와 연관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가 있다.  

 

‘장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충주(忠州)에는 매우 인색한 사람이 살았다. 그는 조기를 천장에 달아놓고 쳐다보는 것을 반찬으로 삼을 정도로 심한 자린고비였다. 굴비는 지금도 값비싼 생선이지만, 당시에는 더욱 귀했다. 자린고비는 제사를 지낸 후에 그것을 천장에 달아놓고 쳐다보며 밥을 먹었다. 보는 것도 아까워 딱 한 번씩만 쳐다보았다. 옆에서 밥을 먹던 아들이 혹여 두 번을 쳐다보면, “이 놈아! 한 번만 쳐다봐라. 두 번 쳐다보면 짜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어느 날 여름에 자린고비는 ‘장에 곰팡이가 피지 말라.’고 장독을 열어 햇볕을 쬐였다. 그런데 장 냄새를 맡고 쇠파리가 날아들어 장을 빨았다. 쇠파리는 엄지손가락 굵기 만했는데, 쇠파리의 다리에 장이 덕지덕지 묻었다. 이를 목격한 자린고비는 빗자루를 들고 파리를 쫓았다. 그런데 쇠파리를 잡아야 한다는 일념에 그만 충주에서부터 ‘장내’ 마을 ‘수살거리’까지 한달음에 달려오고 말았다. 그러나 장 냄새는 여기저기서 풍겨 났지만, 쇠파리를 잡을 수는 없었다. 이에 쇠파리는 없고 장 냄새만 풍겨났다고 해서, 이곳을 ‘장내’라고 일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전설은 글자 그대로 전설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유래비 내용에 내용을 조금 더 추가하면 증평 시가지와 초평ㆍ율리 방면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로, 수살이 있어 수살고사를 올리는 곳이다. 본래 암수살은 지금의 위치에 있었고. 수수살은 남차2리 ‘통기미’에서 홍수 때 흘러내려 왔다고 한다. 전설은 다음과 같다. 남차리 앞에는 장내천이라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예전에 장마가 지면 장내천이 범람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제방을 쌓았지만, 피해는 줄지 않았다. 이에 수수살과 암수살을 방위에 맞게 세우고 수살막이 고사를 올렸다. 그랬더니 이후부터 수해가 없었다. 그러나 병자년(丙子年)에 또 한 번 큰 장마가 졌다. 이때 장마는 ‘배나무고개’까지 삼켜버렸다. 장마는 수수살도 삼켜버렸다. 그런데 물에 둥실둥실 떠내려 오던 수수살이 암수살 옆에 이르더니 급한 물살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멈추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남성이 여성을 찾아 온 것이니, 이는 천리(天理)로 볼 수 있다.”하며 수수살과 암수살을 양쪽으로 세워놓고 더욱 정성껏 위했다. 아직도 마을 사람들은 정월 열 나흗날 수살막이 고사를 올리고 있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 전날 ‘수살제’ 재현 행사를 여는데, 100여 년 전부터 마을에 닥친 수해를 막기 위해 지냈다고 한다. 행사는 수수살제와 암수살제를 중심으로 진행되며 남녀 주민으로 나뉘어 풍년과 재난 방지를 기원하는 암수 줄다리기ㆍ지신밝기ㆍ달집태우기 등 다양한 민속놀이가 펼쳐진다. ‘수살’은 ‘수살막이’ㆍ‘살막이’ㆍ‘수살목’이라고도 부르는데, ‘시골 동네 어귀에 서 있는 돌이나 나무’를 말한다. 동네를 수호하는 신성한 것으로, 전염병이 유행할 때 새끼줄을 쳐서 모시며 또한 병이 낫기를 바라면서 환자의 옷을 걸어 놓기도 한다. 이는 흔히 ‘살방’ㆍ‘수살방’ㆍ‘수살목’ 등의 뜻을 가진 풍수지리상의 비보(裨補)에서 유래된 것이다

 

 

 

 

 

 

 

근간에 새로은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